어느 예술품보다 더 아름다운 삶의 터전 -화포
어느 예술품보다 더 아름다운 삶의 터전 -화포
by 운영자 2005.01.14
우리는 종종 가까이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잊고 산다. 가족과 친구가 그렇고, 화포(花浦)가 그렇다.
순천시 별량면에 자리 잡은 화포는 손을 내밀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있다. 늘 우리 곁에 있어 아주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화포. 그렇다면 우리는 화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화포는 화포라는 이름 말고 ‘쇠우리, 쇠리’라고도 한다. 뒷산의 모양이 소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쇠우리, 쇠리’라 부른다. ‘쇠’는 ‘소’의 우리(전라도) 사투리다. 예부터 마을 사람들은 쇠리라고도 하고 화포라고도 불렀다. 오히려 쇠리라 부르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러던 것이 근래 몇몇 글 쓰는 이들을 통해 ‘화포’라는 이름이 더 유명해져 이제는 마을 사람들조차도 화포라 부른다.
화포(花浦)는 글자 그대로 ‘꽃피는 포구’이다. 봄이면 화포와 맞닿은 봉화산과 마을 남쪽 산등성에서 진달래, 개나리 따위가 흐드러지게 피어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꼭 그 까닭만은 아닌 것 같다. 화포에는 진짜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꽃들이 있다.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려고 온종일 좁다란 ‘갯벌스키(널)’에 의지해 꼬막을 캐고 또 까느라 짜부라진 어머니의 손톱이, 그 마음이 바로 꽃이다.
화포는 그저 둘러두고 보는 바다가 아니다. 땀내 나는 삶의 현장이다.
그 흔한 로션 한번, 매니큐어 한번 제대로 발라 보지도 못하고, 평생을 매서운 바닷바람에 부대끼느라 갈라진 손과 짜부라진 손톱을 보고도 화포 사람들은 밝게 웃는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착하고 순한’ 순천 사람들이다.
화포 사람들이 온종일 캐 온 조개들은 뭍으로 나와 포구 선착장 근처에서 살과 껍질로 나뉜다. 그렇게 나뉜 조갯살은 화포 조개의 참맛을 아는 사람들에게 팔리고, 껍데기는 포구 주변 갯벌에 쌓이고 쌓인다. 높다랗게 쌓인 하얀 조개껍데기는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꽃이다.
‘바다의 꽃’이라 부르는 꼬막도 화포의 꽃 가운데 하나이다. 기름진 갯벌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커야 쫀득하고 시원한 제 맛이 난다.
화포의 꼬막은 화포 사람들에게 징글징글하게 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시리게 고마운 존재이다. 성난 짐승 같은 기세로 달려드는 겨울 바닷바람 속에서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구부리고 앉아 꼬막을 캐야하는 화포 사람들에게 꼬막은 ‘말리는 시누이’보다 더 미운 존재이다. 하지만 꼬막이 아니었으면, 갯벌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그 많은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화포의 갯벌은, 화포의 꼬막은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4살 꼬마다.
바닷물이 빠지면 드넓은 해안선을 가득 메운 갯벌에 갯벌스키가 하나 둘 길을 낸다. 그 옛날 임금님 수라상에 즐겨 올랐다는 꼬막부터 피조개, 바지락까지 정말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 ‘착하고 순한’ 순천 사람들에게 하늘이 내려주신 상인가 보다.
진짜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꽃이 또 있다. 보는 이의 온몸을 붉게 물들이는 것으로 모자라 마음까지 따스한 붉은 빛으로 물들이는 해넘이가 바로 그것이다.
화포의 해넘이는 보는 이에게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뜨끈뜨끈한 할머니네 아랫목처럼, 해가 질 무렵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시골 집 굴뚝 연기처럼.
바다로 지지 않고 드문드문 물길이 난 갯벌 사이로 지는 해는 마치 사람처럼 화포 갯벌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같다.
화포 사람과 해넘이는 갯벌 위에서 더 밝게 빛난다.
화포의 해넘이는 갯벌 위에도 있지만 화포 마을에도 있다. 고되고 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노곤한 몸을 녹이는 마을의 저녁 불빛, 그 은근한 불빛이 또 하나의 해넘이다.
‘겨울 바다’하면 외롭고 쓸쓸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삶에서 멀리 떠난 듯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화포는 아니다. 화포는 겨울에도 살아 숨쉰다. 사람 내 물씬 나는 화포는 둘러두고 보는 풍경이 아니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한가운데다. 생의 한가운데다.
(취재기자 - 최명희)
순천시 별량면에 자리 잡은 화포는 손을 내밀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있다. 늘 우리 곁에 있어 아주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화포. 그렇다면 우리는 화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화포는 화포라는 이름 말고 ‘쇠우리, 쇠리’라고도 한다. 뒷산의 모양이 소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쇠우리, 쇠리’라 부른다. ‘쇠’는 ‘소’의 우리(전라도) 사투리다. 예부터 마을 사람들은 쇠리라고도 하고 화포라고도 불렀다. 오히려 쇠리라 부르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러던 것이 근래 몇몇 글 쓰는 이들을 통해 ‘화포’라는 이름이 더 유명해져 이제는 마을 사람들조차도 화포라 부른다.
화포(花浦)는 글자 그대로 ‘꽃피는 포구’이다. 봄이면 화포와 맞닿은 봉화산과 마을 남쪽 산등성에서 진달래, 개나리 따위가 흐드러지게 피어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꼭 그 까닭만은 아닌 것 같다. 화포에는 진짜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꽃들이 있다.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려고 온종일 좁다란 ‘갯벌스키(널)’에 의지해 꼬막을 캐고 또 까느라 짜부라진 어머니의 손톱이, 그 마음이 바로 꽃이다.
화포는 그저 둘러두고 보는 바다가 아니다. 땀내 나는 삶의 현장이다.
그 흔한 로션 한번, 매니큐어 한번 제대로 발라 보지도 못하고, 평생을 매서운 바닷바람에 부대끼느라 갈라진 손과 짜부라진 손톱을 보고도 화포 사람들은 밝게 웃는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착하고 순한’ 순천 사람들이다.
화포 사람들이 온종일 캐 온 조개들은 뭍으로 나와 포구 선착장 근처에서 살과 껍질로 나뉜다. 그렇게 나뉜 조갯살은 화포 조개의 참맛을 아는 사람들에게 팔리고, 껍데기는 포구 주변 갯벌에 쌓이고 쌓인다. 높다랗게 쌓인 하얀 조개껍데기는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꽃이다.
‘바다의 꽃’이라 부르는 꼬막도 화포의 꽃 가운데 하나이다. 기름진 갯벌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커야 쫀득하고 시원한 제 맛이 난다.
화포의 꼬막은 화포 사람들에게 징글징글하게 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시리게 고마운 존재이다. 성난 짐승 같은 기세로 달려드는 겨울 바닷바람 속에서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구부리고 앉아 꼬막을 캐야하는 화포 사람들에게 꼬막은 ‘말리는 시누이’보다 더 미운 존재이다. 하지만 꼬막이 아니었으면, 갯벌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그 많은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화포의 갯벌은, 화포의 꼬막은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4살 꼬마다.
바닷물이 빠지면 드넓은 해안선을 가득 메운 갯벌에 갯벌스키가 하나 둘 길을 낸다. 그 옛날 임금님 수라상에 즐겨 올랐다는 꼬막부터 피조개, 바지락까지 정말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 ‘착하고 순한’ 순천 사람들에게 하늘이 내려주신 상인가 보다.
진짜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꽃이 또 있다. 보는 이의 온몸을 붉게 물들이는 것으로 모자라 마음까지 따스한 붉은 빛으로 물들이는 해넘이가 바로 그것이다.
화포의 해넘이는 보는 이에게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뜨끈뜨끈한 할머니네 아랫목처럼, 해가 질 무렵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시골 집 굴뚝 연기처럼.
바다로 지지 않고 드문드문 물길이 난 갯벌 사이로 지는 해는 마치 사람처럼 화포 갯벌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같다.
화포 사람과 해넘이는 갯벌 위에서 더 밝게 빛난다.
화포의 해넘이는 갯벌 위에도 있지만 화포 마을에도 있다. 고되고 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노곤한 몸을 녹이는 마을의 저녁 불빛, 그 은근한 불빛이 또 하나의 해넘이다.
‘겨울 바다’하면 외롭고 쓸쓸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삶에서 멀리 떠난 듯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화포는 아니다. 화포는 겨울에도 살아 숨쉰다. 사람 내 물씬 나는 화포는 둘러두고 보는 풍경이 아니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한가운데다. 생의 한가운데다.
(취재기자 - 최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