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고창 구시포·동호바다

고창 구시포·동호바다

by 운영자 2007.04.06

‘몹시 쓸쓸할 적엔 해지는 게 구경하고 싶어져’

철이 이르거나 지나거나 한 해수욕장은 참 황망하다. 여름의 북적거림도 없고 겨울바다의 환상도 없는 봄은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바다도 아닌 ‘해수욕장’이란 이름이 붙여진 바다는 더더욱 그렇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수욕장을 찾은 것은 ‘몹시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다.
“하루는 해가 지는 걸 마흔네 번 구경했어. 몹시 쓸쓸할 적엔 해지는 게 구경하고 싶어져….”

의자를 몇 발자국만 뒤로 물려 놓기만 하면 하루에 몇 번이고 해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작은 별 ‘B612호’에 사는 어린왕자. 내가 사는 지구별은 ‘B612호’가 아니니 해지는 것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서해로 가는 수밖에!

서해바다 곳곳 어디서나 해지는 장관을 볼 수 있으나 바다를 찾은 김에 봄 주꾸미를 맛볼 요량으로 고창으로 향한다.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의 구시포해수욕장과 해리면의 동호해수욕장은 지척이다.
한번 달려 두 군데 모두를 들러도 시간이 넉넉하다.

어린왕자의 별 ‘B612호’까지는 아니지만 해 지는 것을 두 번이나 볼 수 있는 이곳은 그나마 어린왕자의 별 ‘B612호’와 비슷하다.

길이 약 1.7km, 폭 2m의 백사장이 펼쳐진 구시포해수욕장은 명사(明沙)가 끝도 없이 십리(十里)나 펼쳐져 있다. 해수욕장을 빙 둘러선 장자산 줄기는 바깥세상과 이곳을 따로 분리라도 하려는 듯 병풍을 두르고 있다. 그 한가운데 펼쳐진 소나무숲은 멀찌감치 떨어져 해지는 것을 감상하기에 그만이다.

오후 6시.
아직 해가 지기는 이른 시간이다.

해가 한가운데는 하얀빛으로 주변부는 연노랑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은은한 빛에 바다도 따라 은빛이 된다. 은빛이 내내 출렁이는 바다 멀리 가슴 벅찬 수평선이 먼저 들어온다. 저 멀리 손톱만한 섬도 눈에 들어온다. 발아래 고운 모래는 뒷전이다.
바람이 차지만 개의치 않는다. 발길을 해수욕장 왼편 기슭으로 옮긴다.
이곳에는 정유재란 때 주민 수십 명과 비둘기 수백 마리가 반년 동안 피난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천연동굴이 있다. 인적이 드문 동굴은 아늑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다.

허나 이 동굴의 사연보다 신비로운 것이 있으니 구시포의 해넘이다.
곱고 너른 백사장 저편으로 마지막 남은 빛을 바다 가득 뿜어대는 해는 한낮의 쨍쨍한 해와 달리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이내 검은 밤을 드리운다. 지는 해의 붉은 빛을 담은 바다에게서 해의 냄새가 나는 듯하다.

동호해수욕장은 고창 해리면에 위치하고 있다.
5월에 피는 해당화로 유명한 이곳은 다른 해수욕장에 비해 해수의 염도가 높아 피부병, 신경통 등에 좋다는 소문이 나 있다.
이곳의 또 다른 명물은 소나무 언덕 위 바다가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당집(사당).
살아 생전 배가 안전하게 포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불을 켜 주었다는 당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한동안 저절로 불이 켜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런 당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1628년(조선 인조6년) 사당을 세우고 영정을 함께 모셨는데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영정을 갖고 가다가 배가 뒤집혀 그대로 바다에 가라앉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2월 초하룻날이면 제를 올린다.

지금 사당 앞에는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다.
떠난 당할머니 대신 바닷사람 지키라는 듯 이곳의 불은 꺼질 줄을 모른다.

[글·사진 : 순천광양교차로 최명희 기자 / cmh@icros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