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만인의총(천여개의 계단을 애써 오르더라도 ...)
남원 만인의총(천여개의 계단을 애써 오르더라도 ...)
by 순광교차로 2007.05.25
그곳이 주는 가치는 그이상의 의미였다
막걸리를 한 사발 걸치고, 취중 운전 중에 그 옛날 국사책에서나 소개됐을 법한 곳을 찾았다.
바로 만인의총이 그것.
처음 입구에는 참 볼품없단 생각에 바로 발길을 돌리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이왕 취중 운전까지 해가며 찾아온 곳을 그냥 쉬이 지나칠 수 없었던 그 곳은 처음 들었던 생각과는 다소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야말로 성질 급한 사람들이 수행할 곳으로는 그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넓은 대지에 군데군데 서 있는 낙랑장송, 남원시 향교동 628번지에서 찾은 왕건(?)이었다.
더욱이 산들바람 시원하게 불어오는 그들도 곳곳에 준비돼 있으니, 호수를 지나 많은 계단을 애써 올라와도 그 가치를 느끼기 손색없다.
막걸리를 한 사발 걸치고, 취중 운전 중에 그 옛날 국사책에서나 소개됐을 법한 곳을 찾았다.
바로 만인의총이 그것.
처음 입구에는 참 볼품없단 생각에 바로 발길을 돌리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이왕 취중 운전까지 해가며 찾아온 곳을 그냥 쉬이 지나칠 수 없었던 그 곳은 처음 들었던 생각과는 다소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야말로 성질 급한 사람들이 수행할 곳으로는 그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넓은 대지에 군데군데 서 있는 낙랑장송, 남원시 향교동 628번지에서 찾은 왕건(?)이었다.
더욱이 산들바람 시원하게 불어오는 그들도 곳곳에 준비돼 있으니, 호수를 지나 많은 계단을 애써 올라와도 그 가치를 느끼기 손색없다.
충의문과 성인문을 지나 충렬사 본전에서 향을 피우고 그 뒤에 자리 잡고 있는 만인의총 앞에 섰다. 임진왜란이후 전사한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한 무덤답데 그 규모 또한 대단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선열들이 모셔진 묘비를 향해 잠시 묵념을 한다.
그리고 천여개가 되는 계단을 따라 멀리 남원 시내 전경을 바라본다.
때마침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올라온다. 천여개도 넘는 계단 때문에 심히 힘들어 보인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낙랑장송 밑에 앉아보기도 하고 충렬사 단 밑에 살포시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도 한다. 잔디가 펼쳐져 있어 아이들이랑 뒹굴고 놀기도 안성맞춤이다.
영령을 기리기 위한 장소도 되지만 지역민의 휴식공간으로도 만인의총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선열들이 모셔진 묘비를 향해 잠시 묵념을 한다.
그리고 천여개가 되는 계단을 따라 멀리 남원 시내 전경을 바라본다.
때마침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올라온다. 천여개도 넘는 계단 때문에 심히 힘들어 보인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낙랑장송 밑에 앉아보기도 하고 충렬사 단 밑에 살포시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도 한다. 잔디가 펼쳐져 있어 아이들이랑 뒹굴고 놀기도 안성맞춤이다.
영령을 기리기 위한 장소도 되지만 지역민의 휴식공간으로도 만인의총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만인의총은….만인의총관리사무소에 따르면 당초 이곳은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들을 함께 묻은 무덤이다.
왜군은 임진왜란때 전라도지방을 차지하지 못해서 결국 패했다고 생각하여,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선조 30년(1597) 7월말 왜군 11만명이 황석산성과 남원을 공격했다.
남원은 지역적으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요충지로 국가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왜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군럭晥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남원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만 여명의 관리와 군사, 백성이 사망했다.
임진왜란이후 전사한 사람들의 시신을 한곳에 합장하였으며 광해군 4년(1612) 충렬사를 세워 8충신을 제향 했다. 처음 이 무덤은 남원역 부근에 있었으나 민가에 둘러싸이게 되어 1964년 현재 자리로 이전했다.
만인의총 관리사무소 - ☎ 063)625-5394
[글ㆍ사진 : 순천광양교차로 조규봉 기자 / ckb@icross.co.kr]
왜군은 임진왜란때 전라도지방을 차지하지 못해서 결국 패했다고 생각하여,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선조 30년(1597) 7월말 왜군 11만명이 황석산성과 남원을 공격했다.
남원은 지역적으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요충지로 국가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왜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군럭晥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남원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만 여명의 관리와 군사, 백성이 사망했다.
임진왜란이후 전사한 사람들의 시신을 한곳에 합장하였으며 광해군 4년(1612) 충렬사를 세워 8충신을 제향 했다. 처음 이 무덤은 남원역 부근에 있었으나 민가에 둘러싸이게 되어 1964년 현재 자리로 이전했다.
만인의총 관리사무소 - ☎ 063)625-5394
[글ㆍ사진 : 순천광양교차로 조규봉 기자 / ckb@icros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