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일제 식민지 항구 도시 ‘군산’

일제 식민지 항구 도시 ‘군산’

by 운영자 2007.08.24

서럽고 아픈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8월이다. 8월, 몸보다 가슴이 더 뜨거워지는 건 딱 8월 달력 딱 중간에 빨갛게 표시된 그 날 광복절 때문이다.
[사진설명 : 군산내항의 ‘뜬다리 부두’라 불리는 부잔교. 이것 역시 수탈의 상징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군산. 그 때문에 큰 배들이 부두에 정박할 수 없어, 바다 수위에 따라 높이를 자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부잔교를 설치했다. 이 부잔교를 통해 수탈한 쌀을 원활하게 배에 싣고, 일제의 상품을 내렸다. 자료에 따르면 1934년 한해만 200만석의 쌀이 이곳에서 실려 나갔다 한다.]

수직으로 작열하는 태양에 몸이 뜨거워졌다면 태극기 물결로 온 나라가 하얗게 일렁였을 62년 전 그날은 해방에 대한 기쁨과 나라를 되찾은 행복감에 달떴을 것이다. 이후 해마다 8월 15일 광복절은 나라를 위해 죽음도 두렵지 않았던 이들의 붉은 피에, 억울하게 고통 받고 죽어간 이들의 차가운 주검 앞에 가슴이 미어진다.
[사진설명 : ‘뜬다리 부두’에서 조금만 더 여객선 터미널 쪽으로 가다 만날 수 있는 군산세관. 군산항을 통해 드나들던 선박과 물품에 대하여 세금을 거두던 곳이다. 벨기에에서 수입한 붉은 벽돌로 지었다는 이곳은 지은 지 100년(1908년 완공)이 다 돼간다. 세관 내부에는 일제시대 군산항의 풍경과 세관에서 사용했던 물건, 세관의 역사 자료 등을 전시했다. 문이 닫혀 있지만 잠겨 있지 않으므로 당황하지 말고 들어갈 볼 것.]

목포와 함께 식민시대 만들어진 대표적인 항구도시, 군산. 휴가다 피서다 하며 산으로 들로 들뜬 마음 안고 떠나는 대신 서럽고 아픈 역사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은 군산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사진설명 : 일본식 사찰 동국사. 동국사는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제 사찰이다. 일제시대에는 우리나라에 500여개의 일본사찰이 있었다는데 해방과 함께 파괴되거나 무너진 후 재건되지 못했다. 이곳 동국사만이 유일하게 창건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가파른에 떨어져내린 지붕이 전형적인 일본 건축 양식임을 말해준다. 이곳에서 영화 ‘타짜’의 한 장면이 촬영됐다고 한다.]

허나 아쉽게도 군산은 그때 그 치욕스러운 역사의 현장들을 잘 지키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불성실한 표지판이 첫 번째 증거고, 군산 시민 역시 일제 흔적이 그대로 남은 공간들이 어디쯤 붙어 있는지 대부분 알지 못했다.
[사진설명 : 2만여명의 소작농을 거느린 일본인 지주 구마모토의 저택. 지금은 ‘이영춘 가옥’이라 불린다. 일본인 지주 구마모토는 우연히 군산의 넓은 농토와 만경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보고 대규모 농장 만들었다. 그 규모는 소작인 1만3천여 세대에 2만여명에 달했으며 광활한 농지는 여의도의 10배에 이렀다고 한다. 이곳이 ‘이영춘 가옥’으로 불린 이유는 무엇일까. 1935년 구마모토 농장 자혜의원 소장으로 부임한 이영춘 박사는 소작인들에게 자신의 월급을 털어서 식량을 사주며 진료를 했다고 한다. 이곳에 이영춘 박사가 거주하면서 ‘이영춘 가옥’으로 알려졌다.]

기억하자. 잊지 말자. 그리고 알리고 기록하자. 친일청산을 위해, 더 나아가 일본과의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화합과 평화의 미래를 위한 기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진설명 : 발산초등학교 내의 5층 석탑과 석등. 초등학교 안에 웬 석탑과 석등인가 의아겠지만 이것 역시 일제 수탈의 흔적이다. 발산초등학교 자리는 일제시대 시마타니의 농장이 있던 곳. 시마타니는 특히 조선의 옛 미술품, 골동품, 석조예술품에 관심을 가져, 전국 각지의 유물들을 모았다. 초등학교 뒷마당에는 그가 미처 일본으로 실어내가지 못했던 완주군 봉림사터에서 뜯어내온 고려시대 5층석탑과 석등을 비롯해 석초 주초석 맷돌 비석 비대석 석상 석인 망주석 석양 등 30여 점에 이른다. 평생을 조선에 살고 싶어 있던 시마타니는 해방 후 군산의 일본인 중 마지막으로 군정청에 의해 강제로 부산항에서 귀국선을 타야 했다고 한다.]

[글·사진 : 순천광양교차로 / 최명희 기자 cmh@icros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