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진주 경상남도수목원

진주 경상남도수목원

by 운영자 2008.09.05

지는 푸르름 아쉬워 떠난다

지나가는 것에는 늘 미련이 남는다. 지나간 시간, 사랑 하물며 미워하던 것까지도…. ‘더 많이 사랑할 것을, 더 많이 즐길 것을’ 후회가 된다.

지난여름, 마르고 닳도록 ‘여름아 어서 가라, 어서 가’ 빌었는데 정작 아침저녁 쌀쌀한 기운으로, 빛바래 가는 나뭇잎으로, 온화해진 한낮 햇살로 가을을 느끼고 나니 여름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붙잡고 싶어졌다. 여름의 ‘팔팔한’ 기운을 붙잡을 수 있는 곳, 푸르름 그득한 곳으로 달린다.

진주의 경상남도수목원은 아직 여름의 생기를 머금고 있다. 눈 대는 곳마다 초록 일색에 시원하게 내뿜는 물줄기까지…. 나무 사이사이, 야생화 군락 건너 건너 오롯하게 난 길을 걷는다.

구상나무, 솔송나무, 전나무, 개비자나무, 측백나무, 화백나무…. 울창한 나무들이 만들어준 ‘나무 병풍’ 사이 숲 속 오솔길마냥 구불구불 난 길을 찬찬히 아주 찬찬히 걷는다.

향긋한 나무 내음, 초록 잎사귀, 타오르는 태양. 아쉬워하지 않으리. 가는 여름 이렇게라도 붙잡았으니! ?

햇살 맑은 가을날 ‘수목원’에서 놀기
…걷고, 쉬고, 이야기하고, 웃고 또 걷고
세상에 시간만큼 정직한 것이 있을까. 무슨 일이 있어도 설사 우리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어도 시간은 흐르고 그렇게 계절은 바뀌고 있다.
[ 사진설명 : 밀밀한 나무 병풍. 그 아래 나지막한 평상을 만들어뒀다. 펑퍼짐하게 앉을 수도 벌렁 드러누울 수도 있어 좋다. 그 배려가 고맙다. ]

가을이 오고 있다. 명백한 사실이다. 가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는가. 달력의 ‘9월’이라는 이름으로? 아침저녁 부쩍 쌀쌀해진 기온으로? 한결 부드러워진 햇볕으로? 혹 그마저도 ‘바쁘다’는 핑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아는 어떤 별에는 얼굴이 새빨간 신사가 살고 있어요. 그 사람은 너무 바빠 꽃향기를 맡아 본 적이 없어요. 별을 바라 본 적도 없고, 누굴 사랑해 본 적도 없어요.

그 사람은 하루 종일 덧셈을 하면서 수도 없이 말하지요. “나는 바쁜 사람이야, 나는 정말 아주 바쁜 사람이야.”>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중에서-

하루 종일 수도 없이 되뇌는 ‘바빠’라는 말, 하루쯤은 접어두고 가는 여름 잡으러 오는 가을 맞으러 가자.

‘맴- 매-앰’
‘짹짹짹짹’ ‘쪼로록 쪼로록’ ‘솨아- 솨아-’


매미, 산새, 물, 바람이 내는 명랑한 소음들. 경상남도수목원을 몇 발짝만 걸으면 들을 수 있는 정겨운 소리들이다. 땅 위의 어떤 악기보다 아름다운, 자연이 내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누구에게든 초록빛으로 눈높이를 맞춘 나무들 사이를 걷는다.
[ 사진설명 : 피노키오가 굴리는 자전거 바퀴의 힘으로 물이 뿜어 나온다. 재미나고 또 시원한 풍경 ]

아침 햇살에 미처 마르지 못한 아침 이슬이 발목을 적신다. 젖은 나무 냄새가 폐까지 깊숙이 퍼진다. 발아래 푹신한 흙이 밟힌다. 이대로라면 며칠을 걷고 또 걸어도 지치지 않을 것만 같다.

경상남도 진주 이반성면에 위치한 경상남도수목원은 면적 56ha에 전문 수목원, 화목원, 열대식물원, 수생식물원, 무궁화공원 등 국내·외 식물 1700여종, 10만여 본을 수집 식재하고 있어, 편히 쉴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도 아이들의 학습 공간으로도 손색이 없다. 또 친근한 동물들을 만날 수 있는 동물원도 갖추고 있다.

낮은 언덕 언덕을 넘을 때마다 만나는 다른 나무들과 풀, 꽃들이 반갑다. 특히 나무마다 꽃마다 이름표를 달아둬 나무와 꽃과 눈 맞추고 이름을 불러줄 수 있어 좋다.

식물은 주인들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더니, 이곳의 나무들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이름 불러주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많이 들어서인지 훌쩍 키가 크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자기를 사랑하고 예뻐하는 것에 반응하게 되는 모양이다.
[ 사진설명 : 동물농장의 당나귀. 눈이 참 순하디순하다 ]

나무가 좋다고 꽃이 좋다고 공기가 좋다고 수목원을 한번에 다 둘러보는 것은 무리다. 밀밀한 나무들과 낮은 언덕들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사이사이 마련된 나무 아래나 호수 앞 의자에서 쉬어야 한다. 다리 아픈 핑계 삼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워도 좋겠다.

수목원을 둘러보다 길을 잃는 것도 감수하자. 군데군데 이정표가 세워져 있기는 하지만 생김새로만 나무를 구별할 줄 모르는 ‘도시인’이라면 몇 번은 길을 잃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것도 행복 아닌가. 언제 이렇게 푸른 나무들 사이에서 길을 잃겠는가.

수목원 한켠에 마련된 동물원은 동물원이라는 이름보다는 ‘동물농장’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 호랑이, 사자, 독수리 등의 위협이 되는 동물이 아닌 당나귀, 염소, 미니 돼지 등 친근하고 순한 동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 울타리로 고개를 내민 당나귀는 유난히 눈이 순하고, 꼬리 화려한 공작은 털빛이 곱다.

나무와 동물들과 눈 맞춤하고 돌아나오는 길, 다시 높은 건물과 자동차 사이로 돌아가야 하는 일상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어느새 저 멀리 가버린 여름도, 가을이 몇 발짝 들이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시 시간이 흘러 흘러 계절은 다시 돌아올 테고, 나 역시 다시 이곳을 찾으면 된다. 필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마음이다.

[ 글ㆍ사진 : 순천광양교차로 / 최명희 기자 cmh@sgse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