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찬 서리 내린 하동 섬진강가

찬 서리 내린 하동 섬진강가

by 운영자 2009.01.09

“참 좋은 울음 터로다”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를 여행하며 쓴 <열하일기>에서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한 곳 없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몇 시간을 달려도 평지를 벗어나지 못 하는, 가도 가도 끝없는 대륙을 보며 ‘아,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번 울만 하구나’고 탄복한다.

오밀조밀 조선의 지형만 보며 살아오다 가슴까지 후련하게 툭 트인 대륙은 막혔던 한까지도 울음으로 터뜨리기에 충분했을 터다.

이른 아침, 찬 서리 내려 붉게 반짝이는 갈대와 그 앞의 드넓은 섬진강가. 연암의 말이 떠오른다. 막혔던 가슴이 뚫리고 눈물이 흐른다. 시원하다. 연암도 이런 기분이었으리라.

이른 아침, 안개가 깔리고 뽀얀 서리가 사뿐히 내려앉은 섬진강가는 한낮의 쨍한 풍경과 확연히 다르다. 일순 마음이 가라앉고 번잡했던 생각이 나란히 정리가 된다. 새날, 혹여 정리하지 못한 마음이 있다면 이른 새벽 섬진강가로 떠나라. 가서, 울 만한 터에 가서, 맘껏 울고 오라.
[사진설명 : 이병주문학관 전경. 독특한 외관이 눈에 띈다.]

‘지리산’ 작가 이병주 문학기행
‘한국의 발자크’ 이병주가 살아나다
소설 ‘지리산’, ‘그 해 오월’의 작가 이병주.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는 나림 이병주의 말처럼 그는 지리산 골짝골짝을, 그 안의 무궁무진한 얘기들을 글로 풀어낸 한국 현대사의 걸출한 작가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한국의 발자크’라는 말이 따라 다닌다.

프랑스의 문학가 발자크를 꿈꾸던 그는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의 구성, 등장인물의 넘치는 힘과 장쾌한 배경, 소설 곳곳에서 드러나는 명쾌한 논리로 ‘한국의 발자크’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헌데 이병주를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가까운 하동 북천 출신임에도 그를 알고, 좋아하는 이가 손에 꼽는다.

가을이면 코스모스로 유명한 북천변, 이제 작가 이병주도 떠올려주면 좋겠다. 그의 고향 북천역 부근에 지난해 4월 이병주의 이름을 단 ‘이병주 문학관’이 세워졌다. 문학기행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지 않고라도 아이들과 길을 나서보자. ‘지리산’을 읽고 가면 더 좋겠지만 영화 ‘남부군’만 봤어도 재미는 배가된다.

순천광양에서 진주 방면 고속도로를 타고 섬진강 휴게소를 지나 진교 나들목을 빠져 나간다. 진교 나들목에서 곤양 방면으로 가다 1005번 지방도 북천, 고이 방면으로 좌회전해 죽 들어가면 북천이다. 가는 길이 멀거나 어렵지 않아 더 즐겁다.

이병주문학관은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에 2층 건물로 세워져 있다. 이병주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은 그의 소설 속 배경이 되기도 해 더 의미 깊다.

문학관은 여타의 문학관들과 달리 건물 외부는 마치 유럽의 건물 마냥 지붕의 기울기가 완만하고 길다. 독특한 외관부터가 눈에 띈다. 내부는 전시실과 강당 및 창작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시실에서는 연대기 순서로 작가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관련 유품과 작품 등을 소개글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사진설명 : 이병주문학관 전시실의 대형 몽블랑 만년필. 장쾌하게 생각을 써내려갔을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전시관에는 큰 몽블랑 만년필을 주 전시물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만년필로 장쾌한 생각을 물 흐르듯 써내려갔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선생의 유품과 소설책, 일대기, 생전의 집필 모습이 재현돼 있다. 소설 ‘지리산’의 한 장면을 모습을 재현해 디오라마도 볼거리를 더한다. 모든 것이 꽝꽝 얼어붙은 겨울, 형제자매가 총부리를 겨눠야 했을 그 시린 마음이 겨울을 더 춥고 못 견디게 했을 터다.

또한 100석 규모의 강당에는 방음장치와 무대장치도 갖추어져 각종 공연과 영화상영이 가눙한 복합 공간으로 꾸며졌다.

이병주는 일제강점기인 1921년 하동군 북천면에서 태어났다. 북촌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33년 양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공립농업학교를 다녔다.

1941년 일본 메이지대학에 입학, 문학과 예술을 공부했다. 불어를 공부하면서 프랑스 시인들에 매혹됐고, 불어를 더 공부하기 위해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학업을 끝내지 못하고 학병으로 동원돼 일본군 제60사단 치중대에서 보초병으로 근무했다. 해방 후에는 진주농과대학과 해인대학(현 경남대학) 등에서 영어, 불어, 철학을 강의했다 .

이병주는 언론인 출신으로 1955년 부산의 국제신보에 입사해 편집국장 및 주필로 활동했다. 소설을 처음 쓴 것은 1957년. 경쟁지 부산일보의 황용주 주필과 인연으로 국제신보가 아닌 부산일보에 소설을 연재했다.

1958년 2월까지 6개월간 연재한 ‘내일 없는 그날’이라는 장편소설이 처녀작이다. 그는 1961년 5·16 때 필화사건으로 혁명재판소에서 10년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2년 7개월 만에 출감해 외국어대와 이화여대에서 강사로 일했다.

이병주의 공인된 데뷔작은 그의 나이 마흔네 살에 집필한 작품으로, 1965년 월간 ‘세대’에 게재한 중편소설 ‘알렉산드라’다. 이후 ‘지리산’, ‘산하’, ‘그해 5월’, ‘관부연락선’ 등 현대사를 소재로 한 역사 소설을 즐겨 썼다.
[사진설명 : 소설 ‘지리산’의 한 장면을 재현해 뒀다.]

손철주가 쓴 ‘방황하는 청춘아, 이병주를 읽어라’에 따르면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 금기시된 소재인 이데올로기 문제를 둘러싼 지식인의 고뇌를 앞장서서 다루어, 유신체제 하인 1970년대 중반에는 “이제 이병주를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으로 나누자”라는 말이 있었을 만큼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이병주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지리산’은 그가 1912년부터 15년여에 걸쳐 쓴 것으로, 전체 7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이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38년부터 1956년까지 근 한 세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집단생활을 한 빨치산의 이야기를 통해 남북간의 이데올로기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병주의 ‘지리산’을 박경리의 ‘토지’, 최명희의 ‘혼불’과 함께 우리나라의 주요한 대하소설로 꼽는다 .

[글ㆍ사진 : 순천광양 교차로 최명희 기자 /cmh@sgs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