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개펄ㆍ모래해변ㆍ소금밭의 신안 증도

개펄ㆍ모래해변ㆍ소금밭의 신안 증도

by 운영자 2009.03.20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가르쳐줘서 고맙습니다”

“험한 게 뭐야? ‘험한 세상’할 때 ‘험!한!’이 뭐냐구?”
“험하다는 건, 나쁘구 힘들구 못됐구 짜증…”
“세상이 나쁘구 힘들구 못됐어?”

“… 내가 지금 험한 세상이라고 그랬어? 잘못 말한 가야. 비싼 꿀을 많이 먹으니까 말두 이상하게 나오네. 세상은 험한 게 아니구 아름다운 거야, 봄아. 노래도 있잖아. ‘우리 함께 만들어 가요. 아름다운 세상 ♬’”

“나도 배울래. 가르쳐줘.”
2년여 전 종영한 드라마 <고맙습니다> 장면 속, 수혈로 에이즈에 걸린 여덟 살 딸 봄이와 미혼모 엄마 영신이 나눈 이야기입니다.

에이즈, 미혼모. 세상의 높은 편견 속에서도 ‘고맙다’를 연신 입에 달고 사는 봄이와 영신을 떠올리면 하루 종일 투덜대기만 하는 제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봄입니다. 이름 모를 풀꽃들에게까지 눈을 맞추며 기뻐하면서 막상 나의 삶에, 타인의 삶에, 우리의 삶에 가득 불만을 품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귀여운 봄이와 착한 영신, 치매 걸린 할아버지가 ‘고마워’하며 사는 작은 섬마을 푸른도로 떠납니다.
[사진설명 : 신안 증도 우전해수욕장. 고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쏙쏙 들어오는 간지러운 기분은 지구가 살아있음이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숨 쉬는 지구야, 고마워!”

‘어머, 매화도 산수유도 목련도 개나리도 다 피었네? 어머! 어머!’

요즘 습관처럼 달고 사는 말이 ‘봄’이라는 낱말입니다.
파릇파릇한 새싹에 눈 맑고, 곱고 고운 꽃들에 사방 밝은 봄이 어찌 이리도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우죽하면 ‘봄보로봄봄 봄봄’ 노래를 부르고 다닐까요.

헌데 이런 모습은 컴퓨터 앞 책상에서 일을 하거나, 업무로 누군가와 통화를 할 때는 180도 달라집니다. 일단 미간에 힘을 빡 주고, 입 꼬리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단단하게 조여져 있습니다.

웃음은 온데간데없고, 딱딱하고 조금은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차가운 목소리만 남습니다. 어느 날 문득, 책상 위에 둔 거울을 보고서야 제 모습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한시라도 빨리 마음을 다독이고 싶어졌습니다. 일을 대강 마무리한 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납니다. 영신이와 봄이, 할아버지가 사는 푸른도에 가야 하니까요. 가서 ‘고맙습니다’ 딱 10번만 외치고 와야겠어요.
[사진설명 : 봄이, 영신이, 할아버지 세 식구가 오순도순 살았던 집. 그 집에는 이제 지긋한 할머니가 “신구 할아버지 초코파이 한나 묵어 봐” 하신다.]

신안 증도. 영신이와 봄이의 푸른도에 왔습니다.
사람들은 왜 섬에 가고 싶어할까요. 연인들이야 일부러 배 시간 놓칠 요량으로 간다지만 다른 사람들은요?

제가 그 까닭을 오늘,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섬에 가고 싶어하는 까닭은 ‘그대로,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에 하나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요. 게다가 변하지 않는 그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면 더할 나위 없지요.

증도, 푸른도는 여전합니다. 짱뚱어 다리 아래로 갯벌은 여전히 보드랍고, 우전해수욕장의 모래밭도 그대로 곱습니다. 바다 짠 내음도 그대로고, 몇 해 전 영신이가 살았던 집도 그대로입니다.
[사진설명 : 증도 갯벌 위를 지나갈 수 있는 짱뚱어 다리. 갯벌을 가깝게 관찰할 수 있다.]

신구 할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초코파이를 이제는 머리에 찬 서리가 곱게 내려앉은 할머니가 팔고 계시지만요. 세월이 가장 더디 흐르는 곳, 섬입니다.

증도의 갯벌에는 갯벌식물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물이 빠진 다리 위에서 보면 갯벌이 드넓습니다. 햇살에 반짝이는 갯벌이 어찌나 고운지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들어가 찰방거리고 싶어집니다. 그 갯벌에는 짱뚱어가 살고 칠게가 삽니다. 지구가 ‘하악하악’ 숨을 쉽니다.

우전해수욕장의 드넓고 고운 모래해변을 맨발로 걷습니다.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고 발도 몹시 시리지만, 속이 툭 트일 만큼 상쾌합니다.
[사진설명 : 태평염전. 드넓다.]

신안은 소금으로도 유명합니다.
철이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염전을 구경하지 않을 수 없지요?

신안의 태평염전은 단일염전으로 국내에서 가장 큰 곳입니다.
한해 이곳에서 생산한 소금만 1만5000톤 우리나라 천일염 생산에 5%나 차지한다고 합니다.

요즘은 수입산 소금이 많이 들어옵니다. 때문에 염전도 예전만 못하지만 근근이라도 이렇게 맥을 잇고 있는 이곳이 또 고맙습니다.

그저 나를 달래고 북돋울 요량으로 나섰던 길이 돌아가는 즈음 천지가 고마운 것으로 변해있습니다. 멀고 무관심했던 갯벌의 짱뚱어, 모래밭 더 멀리 지구까지 고맙습니다.

‘내가 엎어졌을 때 달려와 일으켜주고, 울고 있을 때 눈물도 닦아주고, 어두운 밤길을 갈 때 핸드폰 불빛으로 길도 밝혀준…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줌마, 아빠, 엄마, 오빠, 언니, 누나, 내 친구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라고 일기 쓰던 봄이를 어느새 닮은 모양입니다.

[글ㆍ사진 : 순천광양교차로 / 최명희 기자 cmh@sgsee.com]

※ 관련기사글 : [맛집멋집] 영광 법성포 일번지식당 ‘굴비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