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화순 둔동마을 숲정이ㆍ임대정 원림

화순 둔동마을 숲정이ㆍ임대정 원림

by 운영자 2009.09.04

마냥 걷고 싶고 머물고 싶은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 바람 불면 부는 대로 / 물결 치면 치는 대로 / 밥이든 죽이든 먹는 대로 살아가고 / 옳은 대로 그른 대로 그대로 살아가세 /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 세상 물건은 시세대로 사고 팔고 / 만사를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 대로 살아가세> - 김삿갓 ‘죽시(竹詩)’ -

사는 것이 조금 피곤하다 여겨질 때면 종종 읊조리는 방랑시인 김삿갓의 ‘죽시(竹詩)’다. 한시(漢詩)로 끝말이 모두 대 죽(竹)으로 끝나 죽시(竹詩)라고 하는데 그 내용이 참 일품이다. 아등바등 살 것 있는가, 여유 갖고 살자.

화순 둔동마을 숲정이길과 임대정 원림은 삿갓의 시대로 살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이다. 기다랗게 늘어선 느티나무, 서어나무, 왕버들이 길을 낸 둔동마을의 숲정이길은 한없이 걷고 싶은 길. 동네 어르신이 코를 낮게 골며 낮잠을 즐기시던 임대정 원림은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곳.
걷고 히치하이크 하고 버스 타고 ‘착한 여행’
화순 골짝골짝 느리게 둘러보기

그래, 이번 여행은 ‘착한 여행’ ‘에코 여행’이라 이름 붙이면 좋겠다. 우선 늘 코앞까지 타고 가던 자동차를 두고 간다. 대신 가을 하늘 아래 걷거나, 시골 할매들과 버스를 탄다. 버스 시간을 못 맞출 때는 히치하이킹도 불사한다.

자동차에 그득 싣고 다녔던 짐은 배낭에 넣는다. 카메라와 삼각대, 여분의 배터리, 수첩, 휴대폰, 물, 간단한 간식은 배낭에 담아 어깨에 둘러멘다.

양산 대신 모자를 쓰고, 또각또각 구두 대신 푹신한 운동화를 꺼내 신는다. 참, 배낭 안에는 핸드백에 늘 갖고 다니던 물티슈 대신 도톰한 수건을 챙긴다.

자, 이제 출발이다! 착한 여행, 에코 여행의 시작이다.
[사진설명 : 임대정 원림. 울창한 나무에 가려 까마득해 보인다.]

■ “여그서 낮잠 자믄 얼마나 단가 몰라” 임대정 원림
화순 남면 사평리의 임대정 원림(臨對亭園林)이 오늘의 첫 목적지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아 더 좋다.

화순읍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임대정 원림’을 물으니 오히려 “거그가 어디요?” 라는 말이 되돌아온다. 마을 사람 몇 분이 “응. 거그 기정떡 유명헌 디서 내리믄 안 멀어” 한다.

40여분쯤 달렸을까. 시골마을에 휘황한 간판이 눈에 띈다. ‘기정떡’이 유명한 탓에 기정떡집을 알리는 간판이 도드라진다.

버스에서 내려 앞으로 죽 가다 길이 갈라지는 길로 오른쪽으로 10여분만 더 가면 목적지 ‘임대정 원림’이다. 헌데 잘 알려지지 않은 탓에 관리가 조금 소홀해 보인다. 눈에 띄는 표지판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싶다. 울울창창한 나무들에 가려 정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널따란 연잎이 연못을 이불처럼 덮고 있는 곳을 빙 둘러 정자로 올라간다. 한여름 해를 받고 물을 받아 쑥쑥 자란 나무들에게서 향기가 난다. 꽃보다 더 진한 나무 냄새.
1985년 2월 전라남도기념물로 지정된 이곳은 1500년대 말, 남언기(南彦紀)가 조성한 고반원에서 유래한다. 남언기는 이곳에 초가를 짓고 일생을 자연과 벗하며 살았다. 그후 민주현이 귀향하여 고반원의 옛터에 3칸 팔작지붕의 정자를 건립하고 임대정이라 불렀다 한다.

살짝 비탈진 길을 따라 오르면 평탄한 마당에 정자가 있고 그 앞에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 뒤편에는 대나무 숲이 둘러쳐있고, 정자 앞으로 드넓은 사평천과 광활한 평야가 내려다보인다. 드러나지 않고 숨어 유유자적 한가로이 즐기기에 안성맞춤.
[사진설명 : 임대정 원림 정자 안에 들어 누우면 이곳의 풍광을 설명한 글들이 보인다.]

사방을 빙 둘러보고 정자 마루에 앉아 안을 들여다보니 마을 어르신인 듯한 한분이 나지막이 코를 골며 깊은 낮잠에 빠져 있다. ‘여기서 한숨 자면 좋겠다’ 했더니만 이미 그것을 실현하고 계신 것이다. 한참을 앉아 지친 다리도 쉬고 땀도 말린다.

자연을 가두지도 인공적으로 만들지도 않고 그냥 자연이 있는 그곳에 살짝 지어둔 우리의 정원. 그래서 더 편하고 아름답다.
[사진설명 : 마을어르신을 깨를 털고]

■ 돗자리 준비 필수, 둔동마을 숲정이
사평리 임대정 원림에서 동복면 둔동마을 찾는 길. 거리상으로 멀지는 않지만 버스 편이 고약하다. 마을 앞으로 지나는 차들에게 손을 번쩍 든다.

어느어느 영화에서는 다리도 살짝 걷기는 하더라만 아무래도 그냥 손만 드는 것이 훨씬 ‘동정심’을 자극하지 싶다. 아니나 다를까 고추를 싣고 가는 트럭 한 대가 멈춰 선다.

‘근처까지라도 괜찮냐’는 말에 ‘고맙습니다’를 몇 번이나 연발했더니만 친절하게도 “얼마 멀도 안응께 거기까지 갑시다” 하신다.

여행에서 얻는 것은 마음의 여유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정이고 믿음이기도 하다.
1500년대, 마을의 홍수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현재 마을 앞에 남북으로 700여m 길이의 숲정이(마을 근처의 숲을 가리키는 순수 우리말)가 형성된 화순 동복면 연둔리 동복마을의 숲정이. 그냥 지나치면 별 것 없어 보이지만 가까이 들어와서 보면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사진설명 : 원림에서 바라보이는 연못의 베롱나무]

흙길 옆 천을 따라 죽 심어진 나무들은 왕버들, 서어나무, 느티나무. 울창한 나무들은 천으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렸다. 물에 비친 나뭇잎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직접 눈으로 확인할 것.

이곳에 오려면 반드시 돗자리를 준비하자. 나무 아래, 물가에 앉아 책도 읽고 수다도 떨자. 간식을 준비해 와도 좋다. 대신 쓰레기봉투를 반드시 챙길 것.

한참을 잔잔한 물가를 바라보다 일어선다. 오늘의 에코여행은 성공이다. 마음까지 착해졌으니 일석이조다.
“이런 곳에도 미술관이?”
한국 인상주의 회화의 기수 ‘오지호 기념관’

<어디 통곡할 만한 큰 방 없소? 나 일하던 공간 편집실로 찾아온 오지호 화백. 수염 모시고 사랑방으로 내려간다. 저 수염, 광주 사람들이 무등처럼 올려다보고 있는 수염. 한자사랑책 한권 주시더니 그동안 유럽에서 서너 달 계셨다 한다. ‘내가 광주에 있었다면 벌써 죽었을 거요.

그애들과 함께 죽었어야 했는데’(5월 17일에는 유럽 촌구석을 헤매고 계셨다는 것이다) 조 편집장, 이 사옥에 어디 혼자 들어가 통곡할 만한 큰 방 없소? 수염 부축하며 배웅해드렸다.

하늘이 살려놓은 저녁 해가 인사동 골목길에서 머리 쾅쾅 부딪고 있다. 혼자 통곡할 수 있는 방을 설계하는 건축가는 없다, 시인뿐이다.> ― 조정권 《떠도는 몸들》(창비·2005) 중 -
[사진설명 : 화순 동북 오지호 기념관. 주차장을 해치지 않을 만큼만 주민들이 고추도 널고 깨도 널며 잘 사용하고 있다.]

“이런 곳에 미술관이?”
그도 그럴 것이 화순은 산이 깊다. 눈을 돌려 보면 사방이 산으로 가로막혔다. 오죽하면 빨치산들이 숨어들었던 곳이겠는가.

이 깊은 곳에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인상주의 회화의 기수, 고 오지호 화백의 기념관이다.

고향인 화순 동복면에 세워진 기념관은 그의 작품을 찬찬히 둘러볼 수 있는 곳. 하지만 아는 이들만 찾아갈 수 있도록 꼭꼭 숨어있어 아쉽다.

기념관 앞마당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주차장으로 만들어두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더 유용하게 쓰이는 듯하다. 볕 좋은 가을 아래, 깨, 고추를 곱게 말리고 있다.

다행인 것은 주차장을 가로막지 않은 채 이용하고 있다는 것. 오지호 화백과 마을 주민이 함께 사는 것 아니겠는가.
[사진설명 : 오지호 作 ‘남향집’]

오지호 화백은 1905년 화순 동복에서 태어났다. 그가 오늘날까지 ‘인상주의의 기수’라 칭송받고 있는 것은 암울하고 어둡기만 했던 일제시대에 태어났음에도 그림에 풍부한 색채와 밝은 빛을 끌어들였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기념관 안의 작품 몇 개만 봐도 금방 느낄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세잔이나 칸딘스키 등 인상파의 계열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색채를 향토적 분위기로 끌어들여 절묘한 성공을 이뤘다는 점에서 한국미술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미술평론가 김윤수의 평을 통해서도 그것은 확인된다.
그는 휘문고보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 해방 이후 1949년 조선대 교수, 1055년부터는 전라남도 문화상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56년에는 국전 초대작가가 되어 1968~73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76년 국전 운영위원을 지냈고, 1976년부터 작고하기까지 예술원회원으로 있었다. 국민훈장 모란장과 예술원상을 수상했으며, 작고한 뒤 2002년 금관문화훈장을 추훈받았다.

송도고보 재직 시절에는 그의 휘문고시절부터 동경미술학교까지 오랜 동기인 화가 김주경과 함께 국내 최초로 총천연색 도판으로 ‘2인 화집’을 자비로 발간, 식민시대 하에서 당시 국내 미술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오지호 화백은 우리 회화사에서 가장 본격적이고 야심적인 작품 활동을 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녹향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사진설명 : 오지호 作 ‘가을’]

그를 일컬어 ‘무등산의 별’ ‘무등산 산신령’ 등의 무등산 호칭이 연결된 말을 붙이는 것도 그의 자연주의적 삶의 태도와 회화와의 연결성을 보여준다.

1950년대 이후부터 제작된 무등산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는 ‘오지호와 무등산’ 혹은 ‘무등산과 오지호’라는 등식관계를 성립시킨 화가로 평가받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특히 일반 화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국한문 혼용론자로 1969년에는 어문교육연구회 부회장(1969년 이사, 1980년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한글로만 교육하면 천재도 천치가 된다”는 극단적인 국한문혼용론을 펼치기도 했다.
[사진설명 : 오지호 作 ‘가을’]

그는 그림을 팔아서 상당한 액수를 국한문혼용운동에 투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이 운동을 위해 스스로 논문을 쓰는 등 적극적 활동을 보였다.

1939년 동아일보에 「피카소와 현대회화」라는 제목으로 피카소 비판 글을 발표, 이목을 끌기도 했던 그는 남달리 미술이론에 대한 저서도 많이 남겼다.
[사진설명 : 오지호ㆍ지양진 부부]

『현대회화의 근본문제』『미와 회화의 과학』『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 』『오지호 김주경 화집』『알파벳 문명의 종언』등이 그것이다.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앓다가 1982년 12월 향년 77세로 타계했다.

[순천광양 교차로 최명희 기자 / cmh@sgs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