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섬진강을 따라가는 박경리 토지길

섬진강을 따라가는 박경리 토지길

by 운영자 2010.01.08

하동포구 80리길. 3개 도, 12개 군을 도는 500리 물길은 하동에 와서 그렇게 불린다. 실제로는 120리, 하지만 하동 사람들 입에는 80리가 더 정감 어린 모양이다.

광양만으로 젖어 드는 섬진강의 애잔한 모습은 이 80리 끝자락에 있다. 드라이브 좀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를 때까지 칭찬하는 19번 국도를 타면 섬진강 꼬리를 따라 하동으로 들어간다. 꽃이 마를 날이 없다는 길 위, 이곳에서 내려다 본 섬진강은 꽃만큼 아름답다.

볕을 받은 강물이 너울질 때마다 섬진강은 황금빛 실처럼 길게 몸을 튼다. 박경리 선생은 이 강처럼 눈부신 이야기를 실처럼 풀어냈다. 여행자에게 이 강은 어떤 이야기를 풀어놓을 것인가. 섬진강과 토지의 고을은 강보다 맑고 땅보다 넓은 이야기를 준비한다.
토지길 따라 가면
드넓은 하동 들판도 있고 섬진강도 있고 쌍계사도 있고…

섬진강 덕분에 하동은 언제 찾아도 처음 찾았을 때와 꼭 같다.
한결 같은 강물이 그렇고, 그 강물에서 장난치는 아이들이 그렇고, 강처럼 말간 하동 사람들의 얼굴이 그렇다. 여정을 준비하는 여행자에게 섬진강변의 평화로운 풍경은 마냥 다리 펴고 앉으라 하는 듯하다. 정말 주저앉기 전에 여행을 시작한다.

■ 강물에 발 담그고, 평사리 공원
강이 지척인 평사리공원으로 들어간다. 입구에서 삐죽 고개를 내민 장승 한 무리가 반긴다. 입을 동그랗게 하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는다.

한때 섬진강 위를 누볐을 나룻배가 강물이 아닌 잔디밭에 앉아 강을 바라본다. 서희도 용이도, 월선이도 탔을 법한 그런 배이다. 그 아래로는 바로 강이다. 넓게 펼쳐진 섬진강 모래밭이 강물처럼 반짝인다. 때도 아닌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릎까지 바지를 걷고 강바닥을 헤집는다.

강물 아래로 모래가 일어나는 것이 보일 정도로 물빛이 단아하다. 모래밭 위에 벗어 놓은 신발들이 볕을 받아 꾸덕꾸덕해진다.

공원 건너편으로 보이는 것이 만석꾼 최참판댁의 평사리 들판이다. 계절마다 꽃이며 보리가 강물처럼 일렁인다. 그 위로 섬진강에서 피어 오른 운무가 앉으면 강물은 어느새 바다처럼 끝을 모른다.

지나가는 길에 들판 한가운데 소나무 두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섬진강 위에 떠 있던 섬이었단다. 주변이 간척되어서도 여전히 섬처럼 남았다. 실한 만석지기 두엇은 족히 낼 만큼 넓은 들판은 동정호에 이르러 한풀 꺾인다.

하동에는 중국 악양만큼 아름답다 하여 악양의 지명들이 붙은 곳이 많다. 동정호도 그 중 하나이다. ‘동정추월(洞庭秋月)’이라는 말처럼 동정호 위로 가을 달빛이 잦아들면 사방이 고요해질 만큼 환상적이었을까.

지금은 늪이 되어 과거의 모습을 잃은 지 오래. 대신 늪이 된 동정호 위로 철새가 날아들며 달빛 이상의 풍요로움을 남긴다. 동정호 저 만치로 형제봉이 우뚝하다. 잦은 발길에 시멘트처럼 딱딱해진 흙길을 따라 올라간다.

1시간 남짓 걸어야 고소성이다. 찍어낸 듯 반듯반듯한 돌들이 벽을 이루고 길을 만든다. 성마른 나뭇가지들을 피해 성을 돌아본다. 올라온 길에 비해 짧은 거리, 복원이 잘 되어 있어 길은 고른 편이다.

가끔 나타나는 가파른 길이 허전한 산행에 감칠맛을 더한다. 아래쪽으로 지나왔던 평사리 들판부터 섬진강변, 동정호가 내려다보인다. 적당한 나무그늘에 앉아 달게 휴식을 취하며 그 경치를 바라보면 성을 지나온 바람이 나지막이 귓가를 스친다.
[사진설명 : 초가가 옹기종기, 나무들이 울창한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 마을 전경]

■ 서희의 서슬 퍼런 호령 들리는 듯
고소성에서 내려오면 들판 끝자락이다. 내려오자마자 금세 아스팔트로 된 오르막길이다. 이 길 중턱에 최참판댁이 있다. 가파르지 않은 언덕길은 살짝 숨이 찰 정도이다. 오르는 길옆으로 「토지」 속 인물들이 살던 초가도 보인다. 금방이라도 문이 열고 쪽진 머리의 아낙이 나올 것 같다.

소소한 소품들마저 누군가 오랜 쓴 것 마냥 손때가 묻어 있다. 긴 시간 혼을 쏟아 써 내려간 작품은 이곳에서 숨을 얻어 현실이라는 벽을 허문다. 초가집 마을을 지나자 기와집이 나온다. 이리 오너라.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외친다.

뛰쳐나오는 머슴 없어도 대문 안쪽으로 들어서니 옛 이야기 그대로이다. 방마다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가구들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린다. 신발만 벗으면 대청에 오를 수 있다. 사랑방 마루에 앉으면 평사리 들판과 섬진강이 보인다.

평사리를 지난다. 악양면사무소를 지나면 조부잣집이라고 불리는 조씨 고가가 나온다. 실제 최참판댁의 모델이 되었다는 곳이다. 어마어마한 식솔과 넘쳐나는 손님들로 늘 밥 짓는 연기가 끊이지 않았다는 곳, 조부잣집 쌀뜨물 때문에 섬진강이 뿌옇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지금은 과거 만석꾼의 자취는 거의 남지 않아 약간의 쓸쓸한 느낌마저 준다. 17년 공을 들여 지었다던 기와집도 세월을 이기지 못한 듯하다. 아직 후손들이 기거하니 고택 앞에서는 발소리가 잦아들 수밖에. 타박타박 걷다 보니 멀리 크고 굵직한 나무가 보인다. 그냥 나무가 아니라 500년 나이를 자랑하는 향나무이다.

이곳이 취간림이다. 마을 사람 몇몇이 나무 아래 앉아 하루를 나눈다. 운동도 할 수 있게 운동기구도 있고, 지친 여행자를 위해 쉴 자리도 마련되어 있다. 살짝 걸터앉자 작은 숲을 헤치고 바람이 불어온다.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땀을 식히기에 충분하다.
[사진설명 : 드넓은 평사리 들녘. 이른 아침 살포시 서리가 내려앉았다.]

■ 섬진강, 꽃잎 떨어지는 소리에 강도 흐름을 멈추고
바람결에 일어나 평사리 들판을 가로지르자 다시 섬진강변이다. 악양루에 올라 화개로 뻗은 길을 보며 앞으로의 여정을 가늠해 본다.

악양루 아래로 구불구불한 강길의 시작. 길을 따라 걷는 것인지 강을 타고 걷는 것인지 강과 길은 사이가 좋다. 봄이 되면 꽃부터 피는 곳이라 봄 마중하기 좋은 길이란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화개장터 가는 길은 섬진강과 함께 이다. 걸어왔던 길만큼 화개장터는 볼 것 많은 곳이다. 재첩 고을답게 재첩국의 구수한 냄새는 장의 이 끝부터 저 끝까지 흐른다.

이것저것 든든하게 먹고 화개장터를 나선다. 화개삼거리를 지나면 굵직한 벚꽃나무들을 만나게 된다. 촘촘하게 심어진 나무들의 가지는 하늘 아래서 지붕을 이룬다. 십리벚꽃길의 시작이다. 벚꽃이 만발하는 4월이면 사람에 치이고 차가 막혀도 좋은 곳이다.
[사진설명 : 전거 타고 씽씽. 섬진강변을 달린다. 풍경도 안기고 바람도 안긴다.]

꽃잎이 눈처럼 날리니 그 아래 서 있는 것만으로도 봄의 정취에 흠뻑 젖게 된다. 연인이 두 손을 꼭 잡고 이곳을 걸으면 백년해로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혼례길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꽃이 피면 꽃보다 고운 청춘 남녀들이 많이 찾는다.

이 길을 지나 쌍계사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차 시배지가 나온다. 지리산 녹차는 말이 필요 없다. 최상품이란 소리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차나무를 키웠다는 자부심도 은연중에 묻어난다. 초록색 물결이 이리로 한 번 저리로 한 번 넘실대자 코끝으로 싸한 차내음이 밀려온다.
[사진설명 : 쌍계사 꽃담. 이른 봄 벚꽃 터널이 아름다운 쌍계사에는 사실 사시사철 꽃이 피어 있다. 쌍계사 대웅전과 나한전 사이에 있는 담에 수놓아진 꽃.]

■ 꽃 흐드러진 쌍계사
쌍계사로 접어드는 길은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다. 말끔하게 정돈된 길이며, 한쪽으로 흐르는 계곡까지 어느 하나 흠 잡을 것 없이 청아하다. 입구에서 오랜 찻집이 친구마냥 여행자를 반긴다. 직접 담갔다는 대추차는 쌍계사를 오르는 또 하나의 즐거움.

목마름도 피로함도 차 한 모금에 씻어 내리고 남은 여정을 시작한다. 쌍계석문바위를 지나 천천히 산책하듯 걷는다. 꾸밈없이 무뚝뚝한 서체가 최치원 선생의 성품을 보여준다. 뒤로는 갖은 멋을 부려 쓴 이완용의 서체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몰래 똥을 가져다 부었다 하여 ‘똥돌’이라 부른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진다. 흐르는 계곡에 옛 이야기 흘려보내고 여행자는 부처의 세계로 들어간다.

일주문과 금강문을 지나며 속세의 더러움은 잊는다. 천왕문까지 지나자 늘씬한 석탑이 보인다. 단아하게 놓인 가람들이 아늑하다. 사람 많은 경내지만 볕이 쏟아지는 모습은 한가롭다. 대웅전부터 명부전까지 두루 둘러본다.

물끄러미 연못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하루 여정이 끝났음이 느껴진다. 산 속은 해가 빨리지는 법, 속세로 서둘러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