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지나간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지나간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by 운영자 2010.01.29

나주 영산포구, 일제 수탈의 흔적을 찾아

지나간 모든 것은 ‘역사’가 된다. 그래서 ‘잘못’한 역사는 고칠 수 없다. ‘그렇게 하지 말 걸’ 후회를 해도 고칠 수 없다.

개개인의 역사도 그렇고 가정, 사회, 나라의 역사도 그렇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영영 고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잘못했다’ 인정하고 ‘미안하다’ 진심으로 사과를 구하는 것 그리고 다시는 그런 잘못이나 실수를 번복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지나간 역사의 잘못을 바로잡는 최소한의 예의다.

지난 13일,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 깜짝 놀랐다. 화면에는 팔순을 넘긴 할머니들이 강추위 속에서 ‘할머니에게 명예와 인권을’이라고 적힌 노란 푯말을 들고 있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주최로 ‘제900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린 것. 헌데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매주 수요일 같은 장소에 모여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를 요구해왔지만 일본 대사관 철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힘겨운 싸움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비옥한 땅 남도에는 일제의 수탈의 흔적이 여전히 많이도 남았다. 내 일이 아니라고,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잊고 살지만 분명 기억해야 할 역사. 그날의 역사를 찾아 떠난다. 나주 영산포구는 그때의 흔적이, 그때 사람들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다.
“쌀이고 뭣이고 배가 미어지게 일본으로 실어날랐제”
일제 수탈의 ‘아픈’ 현장, 나주 영산포구 마을


광복 65주년. 일본과의 ‘아픈’ 인연은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헌데 아직까지 우리 주위 곳곳에 그 아픈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 흔적들은 아픈 상처이기도 하고 부끄러움이기도 하고 반성이기도 하다.

홍어 냄새가 들큰한 나주 영산포구는 일제가 수탈한 갖은 흔적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넓은 땅과 그 땅에서 자란 곡식이 풍부한 남도는 그 때문에 일제의 표적이 되곤 했다.

나주평야와 영산강이 흐르는 나주는 땅에서 난 넉넉한 곡식을 배에 실어나르기 최적의 조건이었던 셈.

나주 영산포구는 목포항의 개항과 함께 일제 침략의 교두보였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사진설명 : 옛 영산포구. 1970년대 영산강 하구언이 생기기 전까지 영산포는 목포항에서 영산강을 따라 내륙까지 연결되는 번화한 포구였다. 전라남도 경제 중심지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발달했던 모습은 옛날 사진으로나마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 옛 영산포구, 들큰한 홍어 냄새 가득
해마다 홍어축제가 열리는 영산포구. 지금은 ‘홍어’가 그곳을 대표하고 있지만 60여년 전 이곳은 일본이 남도의 넉넉한 물자를 운송하던 곳이었다.

영산포 다리를 건너 골목에 차를 두고 내린다. 내리자마자 마치 최루탄처럼 꼬리꼬리하고 시큼하고 들큰한 홍어 냄새가 훅 끼친다. 방심한 탓에 홍어 냄새를 깊이 들이쉰다.

그 꼬리꼬리한 홍어 냄새 뒤로 시큼한 땀 냄새가 나는 듯하다. 일제의 모진 핍박에 땀 마를 날 없었을 우리 민족들이 흘린 땀 냄새가 홍어 냄새와 비슷할 거란 생각이 든다.
[사진설명 : 방학을 맞아, 영산포구에 들린 이들이 표지판을 읽고 있다.]

영산포 등대를 오르는 길, ‘영산강이 들려주는 맛깔스런 이야기’라는 표지판 아래 몇몇 사람이 모여 글을 읽고 있다. 영산강의 역사며 자랑거리, 영산포 등대에 대한 설명을 적어둔 것인데 방학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찾은 이들이 종종 눈에 띈다.

영산포는 내륙 깊숙이 자리한 포구다.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가 이곳에 오면서 저절로 삭았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고려시대 수운의 발달로 형성된 영산포는 1897년 목포항 개항과 함께 전라남도의 경제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헌데 이것이 모순되게 일제가 갖은 재화를 수탈할 수 있도록 창구가 되기도 했다.

1910년 일제는 영산포구에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개폐식 목교를 설치하고 1930년대에는 아예 철근콘크리트 다리를 설치했다. 영산포역과 직선으로 연결된 다리는 나주평야의 쌀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탈해가는 수단이 됐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들어 영산강 하구언이 지어지고 배가 더 이상 드나들지 않게 되자 영산포는 포구로서의 역할을 잃었다. 화려하기도 했고, 또 씁쓸한 현장이기도 했던 영산포구에는 이제 ‘영산포 등대’만이 남아 그 시절을 증명한다.

영산포 등대는 1915년 일제가 영산강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이다. 이제 배가 드나들지 않아 수위를 측정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내륙 하천에 남아있는 유일한 등대로 아직도 저녁이 되면 불을 밝힌다. 현재는 보존 가치가 인정돼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사진설명 : 일본식 가옥. 지금은 1층만 창고 정도로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일본식 가옥
영산포 등대 부근은 영산동과 이창동. 이곳은 포구와 가까운 탓인지 일본식 가옥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골목골목 걷다 심심찮게 일본식 가옥을 볼 수 있다. 물론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아이고, 말도 말어.쩌그 영산강에 배가 수십 대가 띄워졌제. 그 배가 미어지게 쌀이고 뭣이고 수도 없이 실어다 날랐제. 지금이야 홍어 묵으로 온 사람들 맻 사람만 들락거리지만 그때는 사람들도 미어지고 뽁잡했어.”

한가롭게 겨울 볕을 쬐고 있던 마을 할아버지 한분이 60여년도 전을 기억해 얘기한다.
일제강점기 나주의 인구는 14만 6000여명. 그 중 일본인은 3400여명에 달했다.
일본인은 영산포를 침략의 교두보로 삼고 교육, 상업ㆍ금융시설을 만들었다. 해방 후 일본인이 떠난 영산동과 이창동 일대에는 130여 채가 넘는 일본식 가옥이 그대로 남았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장군의 아들>, 1970년대 시골을 무대로 한 드라마 <죽도록 사랑해>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차를 두고 걸으며 마을 골목골목을 누빈다. 지금 마을의 인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람 지나는 것을 보기 힘들 정도로 한산하다. 간간이 누렁이 짖는 소리만 사위를 울린다.
[사진설명 : 일본인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의 저택. 청기와 지붕이며 집의 재료들을 모두 일본에서 들여와 지은 것이다.]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보자 예상보다 더 많은 일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식의 목조 가옥에 일본식 창문, 가옥에 일장기 표시를 했던 흔적까지 찾아볼 수 있다.

꼭 일본식의 가옥이 아니더라도 이곳은 옛날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 우리의 흔적도 여전하다. 사람 둘이 지나가면 맞을 듯한 좁은 골목은 가파르고 시멘트로 어설프게 만들어둔 계단이 있다. 문은 유리가 깨져 나갔고 벽에는 낙서도 잔뜩 돼있다. 지난번 눈에 뿌렸을 연탄재도 보인다.

문이 열어지고, 고무신 몇 켤레가 놓인 일본식 가옥에 들어가 잠깐 둘러봐도 되냐 물었더니 흔쾌히 그러라 하신다.
[◀ 사진설명 : 1층을 창고로 쓰고 있는 일본식 가옥의 2층. 높은 천장과 긴 복도, 다다미방이 일본식 그대로다.] 지금은 1층만 쓰고 있는 일본식 가옥의 2층을 올라본다. 먼지가 끼고 거미줄이 넓게 둘러져 있지만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의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긴 복도에 다다미방과 옷장 등의 흔적이 여전하다.

곳곳의 일본식 가옥들은 한때 살림집으로 쓰다가 지금은 대부분이 빈집으로 남아 있다. 부끄럽고 아픈 역사지만 잘 보존하고 간직했으면 더 좋겠다 아쉬움이 남는다.

영산동 마을 안쪽, 영산포교회 맞은편에는 눈에 띄게 큰 집이 있다. 일제 강점기 나주에서 가장 많은 농토를 보유했던 일본인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의 저택이다.

지금은 문화재 관리 보존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통제라는 것이 그저 담을 높이 둘러치고 천막으로 막아둔 것이 전부다. 제대로 보호하고 관리하고 있는 의문이 들 정도다.

구로즈미 이타로는 전국을 시찰하다가 나주평야를 보고 영산포에 정착해 대지주가 됐다. 지금 봐도 호화로운 저택은 1935년경 청기와를 비롯한 모든 자재를 일본에서 운송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 수탈의 현장이자 항일운동의 근원지 영산포구
앞서 말했듯 영산포구는 일제 수탈의 증거가 된 곳이다. 헌데 또 이곳 나주가 일본에 대항한 학생들이 일어선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해마다 11월 3일이면 기념하고 있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의 시초가 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작이 나주역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나주에서 출발한 호남선 열차에서 일본인 중학생이 한국여학생을 희롱한 것이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과의 싸움으로 번졌고 이것이 불씨가 돼 호남지역에서는 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나주항일학생운동기념관에서는 당시 나주 모습은 물론 독립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나주에는 영산포 등대 이외에도 옛 나주경찰서, 노안천주교회, 남평역사 등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가 많다.
[사진설명 : 병원이 된 동양척식주식회사. 나주매일시장 입구에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았다. 높은 천장의 단층 구조였던 것을 2층 건물로 개조해 내부는 변형이 많이 된 상태다.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은 외과병원으로, 뒤편에 있는 관사건물은 나주곰탕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옛 동양척식회사 건물 등 나주 시내 몇몇 건물은 문화재등록이 예고됐다.
하지만 이것들은 나주 관광안내도에 대부분 기재되지 않아 찾기가 힘들다. 시간과 공을 들이더라도 미리 공부를 하고 떠나는 것이 ‘진짜’ 공부를 위해 더 좋다.

나주시 문화관광홈페이지 http://tour.naju.go.kr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http://www.najusim.or.kr

[순천광양 교차로 최명희 기자 / cmh@sgse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