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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발발 60년

6.25 한국전쟁 발발 60년

by 운영자 2010.06.25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가다

오늘로부터 꼬박 60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했다. 그리고 그 38선을 우리는 여전히 긋고 살고 있다.

전쟁은 광복 후 분단이 낳은 비극의 정점이자 이후 발생한 모든 분단 문제의 시작이었다. 북한의 남한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은 우리나라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국방부 국방군사연구소(현 군사편찬연구소)가 1997년에 펴낸 <한국전쟁>에 따르면 전쟁 중 전체 인명 피해는 유엔군과 중국군을 포함해 군인 322만명, 민간인 249만명에 달했다.

인명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 온 공간에도 전쟁은 큰 상처를 남겼다. 우리가 살던 집이 파괴되고 갈아먹던 땅이 무너지고 훼손됐다. 산과 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절한 전쟁의 흔적은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을 앗아가고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

1953년 7월, 무섭던 포성은 그쳤지만 전쟁은 너무도 깊은 상처를 우리 땅, 우리 사회, 무엇보다 우리 모두의 삶에 남겨 놓았다.

1990년대 이후 우리는 남북 화해와 통일의 가능성을 엿봤다. 허나 한국전쟁이 일어난 60년 후인 지금, 남과 북의 관계가 다시 경직되고 있다. 전쟁,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헤집는다.
상흔에
담긴 평화의 갈망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따라 평화를 꿈꾸다

올해는 한국전쟁 60주년이다. 햇볕 정책으로 따뜻해졌던 남북 관계가 대결무드로 바뀌었다. 날 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전쟁의 참혹함을 깨닫고 평화에 대한 갈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적지를 찾아간다.

거제도.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펼쳐진 휴양지로만 생각하고 있다면, 오늘 그곳의 아픔을 들여다보자.

거제도는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거제도는 전선으로부터 멀었고, 또 어느 정도 고립된 지역이었기에 포로수용소를 만들기에 적합했다. 게다가 산세가 험한 산이 적지 않고 항구 역시 두세 곳에 불과했기 때문에 포로가 산으로든 바다로든 도망치기에는 어려웠다.

거제도는 한국전쟁 당시 포로 17만여 명이 4개 구역 28개 수용동에서 생활했던 곳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당시 수용소 생활을 재현한 곳으로 포로수용소의 배치 및 생활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디오라마관을 비롯해 6.25역사관, 포로생활관, 포로폭동체험관 등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시설들이 갖춰져 있다.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들어선 것은 1950년 11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다수의 인민군 포로가 발생하자 유엔군은 부산 거제리와 경북 영천 등에 있던 포로들을 옮기기 위해 이 섬에 포로수용소를 세웠다.

당시 인구가 10만명이던 거제도는 15만명이나 되는 피란민과 포로 17만명을 받아들였다. ‘크게 사람들을 구제하는 섬’이란 거제도(巨濟島) 그 이름처럼.

거제포로수용소는 지금 유적공원이 자리한 곳에 있지 않았다. 원래 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는 고진항에서 지금의 포로수용소기념관으로 가는 중간에 있었는데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변했다. 때문에 이곳은 당시의 흔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곳이 아닌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곳이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마치 놀이동산 같다. 널찍하게 꾸며, 종종 다리 쉼을 할 수 있는 의자와 그늘막이 있다. 또 전체적으로 공간이 여유로워 공부와 나들이를 병행할 수 있다.
매표소를 지나 탱크전시관으로 들어선다. 김일성, 이승만, 맥아더 등 한국전쟁과 관련한 인물을 가장 먼저 만난다.
탱크전시관을 지나 포로수용소 디오라마관으로 들어가면 전쟁의 축소판이 펼쳐져 있다. 포로들이 거제도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알 수 있게 모형으로 만들어뒀다.
6·25 역사관에서는 전쟁의 발발과 진행 과정을 볼 수 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과 재현물이 잘 돼 있다. 이곳을 나오면 폭파된 평양 대동강철교에 매달린 피란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끊어진 다리 위에서 나간을 타고라도 건너가려는 절박한 이들의 표정이 잘 들어났다.
전쟁의 참상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포로생포관과 포로수송, 여자 포로관, 포로폭동 체험관, 포로 설득관,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관을 돌아보면 6·25가 남긴 상처와 교훈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공원 출구 쪽에는 거의 파괴된 기존 유적지인 경비대 막사와 PX 자리가 남아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전쟁 발발, 7월 이후 낙동강 전선 공방,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뒤이은 서울 수복, 10월 1일 한국군의 38선 돌파, 11월 말 중국군의 본격적인 참전, 1951년 1·4 후퇴, 같은 해 봄 유엔군의 대반격과 38선 부근 재공방 등 일련의 사건을 차례로 지나며 1953년 7월 종료됐다.

전선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포로수용소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1949년 제네바 협정은 전쟁 도중 붙잡힌 모든 포로에 대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송환을 규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소련 점령 지역에서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일본인과 독일인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네바 협정에 서명한 미국은 한국전쟁에서는 무조건 송환에 반대했다.

오히려 제네바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던 북한과 중국이 협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송환을 원하는 자만 송환하는 ‘자의에 의한 송환’을 주장했다.
양자 사이의 이러한 차이로 인해 무려 18개월 동안 정전협상 과정에서 포로 문제를 놓고 쌍방은 치열한 공방을 거듭했다.

3년이란 시간 사이 포로들은 정지하고 있었다. 그 시간,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을까.

중국과 북한, 미국과 남한이 포로 송환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이었다.

포로들마저 친공·반공으로 갈려 있던 당시의 포로수용소 상황은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소설 속 주인공 이명준은 결국 남과 북이 아닌 중립국을 택하고 인도로 떠나다가 투신하고 만다.
거제포로수용소. 그들의 아픈 비극의 현장을 통해 다시는, 어떤 이유에서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또 한번 배운다. <빗방울이 떨어지려나 들어봐 저 소리 / 아이들이 울고 서 있어 먹구름도 몰려와 / 자 총을 내리고 두 손 마주잡고 /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걷어 버려요 / 자 총을 내리고 두 손 마주잡고 /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걷어 버려요>

포로수용소유적공원을 나온 길, 둘레에 쳐진 철조망을 보며 작곡가 김민기가 글을 쓰고 윤도현이 노래 부른 ‘철망 앞에서’라는 노래가 귓전을 스친다.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 경남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 산90-8 일원 ☏ 055-639-0625

■ 가는 길
순천에서 진주 방면으로 남해고속도로를 타다, 진주 가기 전 통영대전중부고속도로로 빠져 70여 킬로미터쯤 달린다. 통영 나들목으로 대전ㆍ통영 방면으로 우측 방향으로 달린다. 시청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가면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 닿는다. 관광의 도시답게 곳곳에 표지판이 잘 돼 있어 찾기 쉽다.

■ 관람
입장료 어른 3000원, 어린이 1000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 가능. 포로수용소유적공원관광안내소 055-639-3551, 거제시청 관광과 055-639-3918, 거제관광안내소 055-639-3399

■ 숙박
거제는 ‘레저와 휴양의 섬’이라는 명성답게 좋은 숙박시설이 많다. 특히 바다가 조금이라도 보인다 싶으면 어김없이 펜션이 들어차 있다. 워낙 아기자기한 펜션이 많다보니 선택하기조차 힘들다. 거제시 문화관광 홈페이지(http://tour.geoje.go.kr/main/)를 참고하면 된다.

■ 그 밖의 가볼만한 전쟁유적지
거제포로수용소 외에도 전쟁의 아픔을 볼 수 있는 유적지는 많다. 벌써 60년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의 모습을 반추해볼 수 있는 유적지들이 남아있다.

▲ 인천 팔미도 등대
1903년 세워진 인천 팔미도 등대는 국내 최초의 등대이다. 1901년 일제가 대한제국과 맺은 협약에 따라 세워졌다. 하지만 더 이상 불을 비추지 않는다. 팔미도 등대는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 대북첩보부대였던 켈로부대 대원들이 이 등대를 탈환, 1950년 9월 15일 불을 밝힘으로써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길잡이 역할을 해냈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팔미도 등대 옆에는 기념 조형물인 ‘천년의 빛’이 설치됐다.

▲ 칠곡 다부동 전적지
다부동은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적지 중 하나이다. 이 일대를 뺏길 경우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국군은 사생결단으로 전투에 임했다. 다부동고개는 황학산·유학산·소학산 틈새에 있어 예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인근의 유학산은 대구시를 공략하기 좋은 요새로 북한군과 국군이 8일간 9차례나 번갈아 공방전을 벌였던 곳이다. 전적지에는 기념비와 전적기념관이 있다.

▲ 용산 전쟁기념관
국내에서 가장 큰 전쟁기념관이다. 11만여㎡ 규모의 기념관에는 호국유물 1만여점이 전시돼 있다.

야외에는 한국전쟁때 쓰였던 폭격기, 전투기, 탱크, 미사일 등도 있다. 전쟁 상징조형물로서 한국군 형과 인민군 동생이 전장에서 만난 실화를 다룬 직경 18m, 높이 11m의 ‘형제의 상’도 눈여겨볼 만하다. 복도를 따라 전사한 국군 장병 16만여명과 유엔군 장병 3만8000여명의 이름이 새겨진 명비가 있다.

▲ 화천 비목공원
가곡 ‘비목’의 탄생 배경이 된 곳이 바로 화천이다. 화천은 한국전쟁 당시 치열하게 남북이 싸운 곳이다. 1960년대 중반 이 지역에서 장교로 복무했던 한명희씨가 이끼 낀 돌무덤 하나를 찾아냈다.

녹슨 철모가 뒹구는 돌무덤을 보고 노랫말을 만들었다. 이 노래가 바로 ‘비목’이다. 비목공원에는 기념탑과 녹슨 철모를 얹은 나무 십자가들이 있다. 전두환 정권은 80년대 북한이 남한을 물바다로 만들기 위해 금강산댐을 만든다며 이를 막기 위한 댐을 건설하겠다고 성금을 모금했다.

금강산댐 수몰 위협은 전두환 정권이 과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파로호라는 이름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붙인 것이다. 중공군을 무찔러 오랑캐를 깨부셨다는 뜻으로 파로호라고 명명했다.

▲ 강원 고성 DMZ박물관
민통선 내에 있다. 비무장지대(DMZ)의 생태환경과 식물, 동물들에 관한 자료를 볼 수 있다. 물론 한국전쟁 관련 자료도 있다. 전쟁 발발 전후 한국의 모습과 휴전선이 생기게 된 배경과 의미, 전쟁의 아픔 등을 담은 자료들을 전시한다. 월요일은 휴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