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300리 물길 따라 흐르는 선비의 ‘풍류’

300리 물길 따라 흐르는 선비의 ‘풍류’

by 운영자 2011.09.23


나주 영산강변, 정자(亭子) 기행

가을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정수리를 날카롭게 내리꽂던 볕은 어느새 날이 보드라워졌다. 고운 볕과 산들한 바람, 나들이 가기 이만큼 좋은 계절이 또 있을까.

이런 가을날은 한없이 걷고 싶다. 걷다가 지치면 바람 잘 드는 곳에 털썩 주저앉아 쉬면 된다. 물 좋고 경치 좋은 나주 영산강변에 ‘조르라니’ 자리한 정자(亭子) 기행은 걷고 또 쉬며 여행하기 좋은 곳.

영산강은 담양의 용추봉(해발 560m)에서 발원해 호남을 관통한다. 115.5㎞에 이르는 강줄기는 산과 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굽이굽이 흐르는 300리 물길에 선조들이 세워둔 정자가 나란하다. 그 옛날 선비들의 풍류가 고스란히 담긴 정자를 찾는다. 옛 선비들이 즐겼던 멋과 흥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 아래서 망중한도 즐겨본다.

나주 영산강 역사 따라 굽이굽이 걷기

광주, 전남 8개 시군을 관통하는 영산강은 호남의 젖줄. 끝없이 펼쳐진 호남 들녘을 넉넉히 휘감아 도는 물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일상에 찌들었던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계절별로 달라지는 강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는 것도 큰 재미.

겨울에는 억새와 어우러진 풍요로운 들판과 강물이 마음 한구석을 아련하게 적신다. 특히, 일몰 시간 붉게 타들어가는 강물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물길 따라 세워진 정자들은 굳이 선비들의 풍류를 생각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다.

영산강은 생명의 원천이자 문화의 통로다.

그 언저리에는 자연을 벗 삼아 학문과 풍류를 즐겼던 정자가 곳곳에 들어앉아 운치를 더해준다.

현재 나주는 기오정을 비롯해 30여개의 정자가 남아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나주에 200여개의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 나주가 한양을 닮았다며 ‘소경’(小京)이라고 적었다.

한양의 진산이 삼각산이라면 나주의 진산은 금성산이고, 한양에 한강이 있다면 나주에는 영산강이 있고, 한양과 나주에는 각각 남산이 있기 때문이다.

‘전라도’(全羅道) 명칭도 전주(全州)의 ‘전’(全)자와 나주(羅州)의 ‘나’(羅)자를 합쳐 만든 것이다.

이처럼 나주가 역사와 문화가 응집된 ‘호남의 천년고도’로 대접받은 데는 영산강의 역할이 적지 않다.
■ 기오정(寄傲亭)
나주 다시면 회진리 동촌마을 영산강변에 터를 잡은 정자다. 조선시대 재실형 정자로 반남 박씨 박세해가 1669년(현종 10년)에 세운 후 문인들과 교류하며 후학을 지도했다.

정면 4칸·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정자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영산강과 마주하고 있다. 서쪽 2칸은 마루, 동쪽 2칸은 방과 툇마루로 구성된 현재의 건물은 1981년에 부분 보수한 것이다. 들풀이 감싼 정자는 지대가 높고 사방이 터져 시야가 아름답다.

■ 영모정(永慕亭)
기오정에서 영산강을 좌측에 끼고 5분 거리의 회진마을 입구 언덕에 들어앉았다. 1520년(중종 15년) 귀래정 임붕이 세운 정자는 풍류객이자 천재 문인인 백호 임제 선생이 글을 배우고 시작(詩作)을 즐겼던 곳이다.

당초 임붕의 호를 따 ‘귀래정’이라 불렀지만 1555년(명종 10년) 임붕의 두 아들이 ‘어버이를 길이 추모한다’는 뜻의 영모정으로 이름을 바꿨다.

도로변에 세운 임제 선생 기념관을 거쳐 돌계단을 오르면 정면 3칸·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정자는 400년 된 팽나무와 느티나무, 200살을 훌쩍 넘긴 고목들을 마당에 거느리고 있다.

400년생 팽나무 거목에 둘러싸인 영모정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영산강과 장어로 유명했던 구진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고목은 어둡고 습하고 음침하다. 정자에 걸터앉아 고목 사이로 영산강을 바라본다. 가을바람 시원하고 눈앞의 풍경도 평화롭기 그지없다.

황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도가를 지었던 임제 선생은 이곳에서 선비들과 교류하며 수많은 시를 남겼다.

이율곡도 인정한 천재 시인 백호는 나주로 낙향 후 부패관료와 망국적 붕당정치를 규탄하다 39살에 요절한다. 그의 시 가운데 요절하기 전 가족에게 유언으로 남긴 ‘물곡사’(勿哭辭)가 유명하다.

“사방팔방의 오랑캐들은 저마다 황제국이라 칭하는데(四夷八蠻皆呼稱帝) 유독 조선만이 기어들어가 중국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을 뿐이다(唯獨朝鮮入主中國) 내 살아 무엇하리(我生何爲) 내 죽은들 어떠하리(我死何爲) 울지 말아라(勿哭)”

죽기 전까지 힘없는 나라 조선을 한탄하는 애국심이 절절하다.

■ 석관정(石串亭)
나주 다시면 동당리 동백마을에 자리한 정자는 영산강의 ‘S라인’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면소재지에서 영산강변을 따라 6㎞ 떨어진 정자는 1480년(성종 11년) 함평 이씨 이극해가 ‘인수정’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후 증손인 석관 이진충이 정자를 보수하면서 석관정으로 이름을 바꿨다. 영모정에 비해 소박하지만 정자가 품은 연륜은 깊다.

신녕현감을 지낸 후 귀향해 영산강과 고막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정자를 세운 이진충은 이곳에서 후손을 가르치며 만년을 보냈다.

정유재란으로 폐허된 후 1998년 바닥에 시멘트를 깔고 돌기둥을 세운 정자는 정면 2칸·측면 2칸에 단층의 석조 팔작 골기와 지붕을 얹었다.

나무기둥은 돌기둥으로 바뀌고 마룻바닥을 대리석으로 치장해 고풍스러운 느낌은 찾기 힘들지만 강 건너에서 만나는 석관정의 풍광은 아름답다. 특히 이른 아침 영산강에서 피어오른 물안개와 어우러지면 그것은 한폭의 수묵화같다.

‘나주제일정’(羅州第一亭) ‘영산강제일경’(榮山江第一景) 등의 현판과 ‘석관정기’(石串亭記) 등의 시문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이웃한 죽산리 화동마을 쇠뫼산 정상 부근에 자리 잡은 월계정은 영산강 위에 뜬 달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이다.

■ 금강정(錦岡亭)나주 공산면 신곡리 봉산 중턱에 자리 잡은 정자다.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석관정과 마주한 정자는 단층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측면 2칸의 구조다. 광산인 상수라는 사람이 부친의 노년 휴식을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정자는 반듯하다. 하지만 현대식으로 보수해 옛 정취는 덜하다. 정자 자체의 정취는 덜하지만 풍광은 예전 못지않을 듯하다.

정자에서는 봉산에 가려 영산강의 ‘S’자형 물줄기를 볼 수 없다. 나주평야와 영산강, 나주영상테마파크를 한눈에 보려면 봉산에 올라야 한다. 정자 우측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봉산 정상. 시야가 확 트인다.

나주평야는 드넓고, 봉산자락 유순한 언저리를 따라 ‘S’자로 흐르는 강줄기와 그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황포돛배는 한 폭의 산수화다. 봉산에서 조우하는 새벽 풍광과 일출도 장관이다. 자욱한안개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물줄기는 아침 햇살에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 쌍계정(雙溪亭)
쌍계정은 원래 충열왕 때 문정공 정가신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당시 쌍계정은 문정공 정가신과 문속공 김주정, 문형공 윤보 등이 학문을 닦던 곳이라 하여 삼현당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 후 조선 세조로부터 선조년간에는 어은 정서, 신숙주, 신말주, 죽오당 기건, 반환 홍천경 등이 모여 국내 현사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던 조선시대의 대표적 정자로 손꼽히고 있다.

현판 글씨는 한석봉이 쓴 것으로 전한다. 건물의 형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집이고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고 사방이 터져 주위의 산수와 나무가 풍치 있게 잘 어울린다.

쌍계정이란 명칭은 정자 좌우로 계곡이 흐르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쌍계정을 세운 정가신은 나주 출신이며 고려 충열왕(1274~1308) 때의 중신이다.

■ 만호정(挽湖亭)
만호정은 고려 때 창건되었다고 전하나 그 유래와 사적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무송정(茂松亭)이라 하였다가 어느 때인가 쾌심정(快心亭)으로 이름이 바꿨다. 이후 정자가 퇴락하자 영조 50년(1774) 영건도유사 서홍조(營建都有司 徐弘祖)등 이 주축이 되어 집집마다 쌀을 거두어 재원을 마련하여 정자를 고치고 만호정이라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구전에는 마을 앞까지 밀려들어오던 영산강 물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당긴다는 뜻에서 만호정이라 붙였다고 한다. 현재의 정자 모습은 당시의 중건 상태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만호정은 나주지역의 대표적인 정자로 서씨·정씨·윤씨의 3성씨(三姓氏)가 관리하며 향약과 동약을 시행하였던 곳이다. 「만호정기(挽湖亭記)」외에도 71편의 제영시(題詠試)가 전한다.
단층 팔작지붕,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다.

■ 벽류정(碧流亭)
영산강 정자기행의 종착지다. 답사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간다. 세지면 벽산리에 자리해 영산강과는 다소 떨어져 있지만 대나무와 고목을 두른 정자는 나주에서도 보기 드문 경관을 자랑한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돌계단이 운치 있다. 돌틈에서 고개를 내민 들풀이 환하게 미소 짓는다. 정자에 오르니 숲이 짙어 공기는 맑고 상큼하다. 1640년(인조 18)에 김운해가 세운 정자는 정면3칸·측면3칸 규모. 가운데 방을 두고 사방에 마루를 들였다. 골기와 팔작지붕은 처마의 흐름이 유려하다. 후면의 툇마루가 1단 높게 설치된 점이 이채롭다. 특히 다른 정자와 달리 온돌을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글씨에 능한 황사 민규호와 위당 신헌의 현판, 김수항의 정기 등 11개의 현액을 볼 수 있다. 사방이 고목으로 둘러싸인 정자 툇마루에 앉아 산바람을 쐰다.

제대로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싶다면 나주에서의 하룻밤도 권한다. 문화재자료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는 목사내아(內衙)는 목사가 정무를 보던 관아의 근처 살림집이다.

목사는 고려와 조선시대 행정구역 목(牧)을 맡아 다스린 정3품 문관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도지사 정도가 되는 셈. 목사내아는 나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유적으로 조선 후기 상류층의 생활공간을 엿볼 수 있다. 전통양식인 한옥 ㄷ자형으로 지어졌으며 평면 구조로 되어 있다.

나주시는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아 이곳을 군불을 땔 수 있는 온돌방으로 바꾸고 생활 시설을 마련해 관광객들이 고택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

아침저녁 찬 바람이 소슬하게 부는 가을, 뜨끈한 아랫목에 등을 대고 누워 온 가족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보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전통 한옥이지만 화장실, 샤워실 등이 현대적으로 잘 마련되어 있어 불편함은 전혀 없다.

▲ 주변 볼거리 : 불회사, 금성관, 목사내아금학헌, 나주 칠천리 석불입상·칠불석상, 영산포, 나주영상테마파크, 나주호, 반남고분군, 메타세쿼이아길 등. 다시면 회진리에 위치한 나주천연염색문화관에서는 전통천연염색 상품을 관람하고 체험할 수 있다.

▲ 먹을거리 : 예부터 나주는 남도의 육지와 바다에서 나는 특산물의 집산지로 알려져 음식문화가 발달됐다. 나주곰탕과 영산포 홍어, 구진포장어, 정통한정식, 송현불고기 등이 ‘나주 5미(味)’로 꼽힌다. 말갛고 시원한 국물맛이 일품인 나주곰탕은 금계동에 조성된 곰탕거리에서 즐길 수 있다. 과거 임금에게 진상품으로 올려진 영산포홍어도 별미다.

▲ 황포돛배체험 : 공산면 나루터에서 황포돛배를 체험할 수 있다. 과거 흑산도, 영산도, 칠산도 등을 거쳐 영산포까지 물자를 실어 나르던 황포돛배를 복원해 금강정까지 왕복 운행한다. 어른 5000원, 청소년 4000원, 어린이 3000원. (061)330-8714

▲ 문의 : 나주시청 문화관광과 330-8107

[교차로신문사 / 최명희 기자 cmh@sgse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