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고창, 마지막 가을 만나고 오는 길

고창, 마지막 가을 만나고 오는 길

by 운영자 2011.11.11


‘화알짝’ 국화 옆에서

가을이 깊이 익었다. 아니, 깊이 익다 못해 ‘후’ 입김만 불어도 바스락 소리를 내며 사라질 것만 같다.

가로수 은행잎은 물든 지 오래고, 출근을 위해 눈 뜬 아침은 사위가 깜깜하고, 내로라하는 단풍 여행지의 단풍도 와르르 땅 위로 떨어져 깔렸고, 어느새 낮에도 쌀쌀한 기운이 덮친다.

만추(晩秋)다. 색을 잃은 세상에 오직 국화만이 가을을 밝힌다. 노랗고 붉은 국화만이 안간힘을 쓰며 가을이 가는 길을 비추고 있다.

미당 서정주의 고장 전라북도 고창. 6만여평이 넘는 들판에 그득 국화가 피었다. 국화 옆에 선다.

미당 서정주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지만 국화꽃은 죄가 없다. 마지막 가을에서 만난 국화는 아름답기만 하다.

그대 곁에 가만가만 핀, 국화 되어
고창국화축제, 국화 사잇길로
“54일이에요.”출근해 막 자리를 정돈하고 앉으니 저쪽에서 소리가 난다.

“뭐라고? 뭐가 54일이야?”
“올해가 54일 남았다고요.”
“아! …….”

2011년 달력은 달랑 두 장, 가을은 끝자락.
마음은 우중충한 날씨처럼 자꾸만 가라앉는다.

주변이라도 화사하면 그나마 좀 나을까 싶은데, 무르익은 가을은 색을 잃어 어둡기만 하다.

자꾸 무거워지는 마음에 기운을 줘야겠다.

일부러라도, 헛바람이라도 넣어야겠다, 생각하던 찰나 우연히 국화를 한가득 찍어놓은 사진에 꽂힌 시선이 오래 머문다.

평소와 달리, 만사가 귀찮은 탓에 엉덩이와 발이 무겁지만 ‘불끈’ 일으킨다. 색색의 국화를 보면 나아지리라. 안개처럼 짙고 낮게 가라앉았던 기분이 좋아질 테다.

국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고창.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길을 재촉한다.

■ 국화 사잇길로, 국화축제장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성남리 일대는 지금 국화가 지천이다. 벌과 나비도 향을 맡고 날아들고 사람들도 어찌 알고 찾아왔는지 색색의 국화 사잇길로 걷는다.

노랗고 빨갛고 하얀 오색 국화가 밭처럼 도랑을 이어 기다랗게 심겼다. 봄, 보리밭 사잇길을 걷던 이들이 가을, 국화 사잇길을 걷는다. 사람들의 웃음도 이내 국화향을 내며 퍼진다.

<수천 수만 송이 /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납니다 / 생각에 생각을 보태며 / 나도 한송이 들국으로 / 그대 곁에 / 가만가만 핍니다> - 김용택 ‘나도 꽃’ -

김용택 시인은 수천 수만 송이 꽃들 사이에서 자신도 조용히 한송이 들국으로 피어난다 했다. 고창 국화밭, 국화 사이에 서니 시인처럼 나도 한송이 국화로 피어날 것만 같다.

국화축제는 ‘시련을 아름다움으로’ 라는 주제로 오는 13일까지 이어진다. 인절미떡 만들기, 연ㆍ허수아비 만들기, 변강쇠와 장승의 만남, 중국기예단 서커스, 달집 소원 달기, 얼씨구 노래자랑 등의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서정주 시 댓글 달기, 시화전, 미술전시, 먹거리 장터 등도 갖췄다.


■ 시에서 오롯이 피어나는 국화, 미당시문학관
국화축제장뿐만 아니라 국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또 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문학관과 생가를 잇는 질마재길까지 국화는 이어진다.

사실 고창이 국화로 유명해진 까닭은 바로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 덕이다. 미당 서정주가 나고 묻힌 곳이 바로 이곳, 고창이기 때문. 고창에는 서정주 시인의 생가와 시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미당시문학관 앞도 노오란 국화가 만발했고 시문학관 옆 생가 앞에서 국화가 그득그득 넘쳐난다.

폐교된 선운분교를 활용해 꾸민 시문학관은 서정주 시인의 유품, 시 작품 등이 전시돼 있다. 삐걱삐걱 나무 소리 나는 전시실은 그 시절 ‘국민학교’의 추억을 돌아보게 하고, 미당의 시를 더 맛깔나게 한다.

미당시문학관에는 미당의 육필 원고를 비롯해 그간 출간되었던 서적과 미당이 썼던 책상 등이 전시됐다.

시문학관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은 옥상의 전망대. 난간에는 미당의 시가 새겨졌고 그 너머로는 너른 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시문학관을 나와 미당의 생가도 들러볼 일이다. 미당의 생가 앞마당에도 노란 국화가 활짝 피었다.
그뿐이 아니다.

생가에서 나와 질마재길 가는 사이에도 국화가 있다. 시간이 조금 여유롭다면 질마재길을 걸어보자.

가을이 발 아래 짙게 깔린 질마재길은 가을에 걷기 그만이다. 경사가 완만하고 흙길을 걷는 기분이 좋아, 언제 걸어도 즐겁기만 하다.

그 옛날 서정주 시인도 이 길을 걸으며 시의 소재를 찾았다고 한다. 철모르고 몇몇 남은 꽃무릇도 반갑다.

■ 사시사철 국화가 피는, 부안면 돋음볕마을
가을에 피는 꽃 국화지만, 고창에는 사시사철 국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물론 진짜 국화는 아니다. 하지만 진짜 국화만큼이나 예쁘다. 국화를 닮은 사람들은 더 예쁘다.

고창 부안 송현리 돋음볕 마을은 마을 담장에서 국화꽃을 만날 수 있다.

미당시문학관 인근의 이 마을 담장은 온통 국화다.

마을 하얀 담장에 그려진 노랗고 붉은 국화꽃은 평범한 시골 마을에 생기를 더한다.

우중충한 날씨에도 담장만 보면 활짝 웃음이 날 것 같다.

꽃 국화뿐만이 아니라 사람 국화도 담벼락에 그려졌다. 마을 주민들의 얼굴을 그려둔 것이다.

빠글빠글 파마머리에 눈가며 입가, 이마에 주름이 깊게 진 ‘아짐’의 얼굴은 진짜 국화만큼이나 향그롭다.

인생의 뒤안길을 걷는, 실제 국화꽃보다 더 고운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벽면을 채운 누님들의 환한 미소는 국화꽃 활짝 핀 모습과 견줄 바가 아니다.

돋음볕 마을은 국화축제장에 30여분 거리에 있다. 축제장에서 나와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선운사 나들목으로 나와, 부안 방면으로 가야 한다. 미당시문학관 이정표를 보고 찾아가면 어렵지 않다.

<국화가 없었다면 우리의 가을날 창가는 참으로 초라할 뻔했다. 가을에 피어나 씨앗을 맺는 국화는 그래서 열매도 만들지 않는다.

가을이면 바람은 얼마나 달콤한 방랑자인가. 국화는 흰 솜털 풀풀 날리는 씨앗을 바람에 부탁한다. 가을 서정의 극치이다.>

식물학자 차윤정의 <꽃과 이야기하는 여자>에서 가을 서정의 극치, 국화는 고창 어디에나 피어 있다. 국화 향은 고창을 메운다.
▲국화축제장 약도

[교차로신문사 / 최명희 기자 cmh@sgsee.com]
일순간 활기찼던 사무실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착’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