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금성산ㆍ금성산성
담양 금성산ㆍ금성산성
by 운영자 2011.12.02
“저 너머 적들이 쳐들어오는 걸 지켜봤대”
담양 금성산은 그리 잘 알려진 산은 아니다. 등산객들이 일부러 찾는 곳은 아니지만 소소한 아름다움이 숨어있는 곳.
특히 드라마 ‘선덕여왕’이 촬영된 금성산성은 등산로가 잘 닦여 있어, 산행과 역사 공부를 겸한 가족 산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산도 오르고 역사 공부까지 할 수 있는 담양 금성산을 가보자. 담양군 금성면과 전라북도 순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금성산(603m)에 위치한 금성산성은 무주의 적상산성, 장성의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으로 꼽힌다.
금성산성까지 오르려면 아주 약간 발품을 팔아야 한다. 하지만 길이 험하지 않아 30여분 정도면 누구나 오를 수 있다.
30여분만 올라도 발 아래 담양의 너른 들판과 금성산 산줄기가 내려다보인다는 것을 미리 안다면 더욱 발걸음은 가벼워질 터.
금성산 산행코스는 총 3가지.
남문→동문→북문→서문→남문 코스가 대표적이며 4시간 정도 소요된다. 가파른 길을 피해 북문에서 보국사 터→남문으로 빠져도 된다.
2시간 30분 소요. 남문→서문→철마봉→남문 코스나 남문→동문→보국사 터→남문 코스는 1시간 30분 정도로 다른 코스에 비해 짧은 편이다.
산성에 오르기 위해서는 담양리조트 옆으로 길이 나 있다. 그 길을 따라 1km를 더 가면 등산로 입구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걷는다. 산성까지 이르는 등산로는 ‘어, 쉽네?’ 하다가도 가팔라지고 널찍하다 싶으면 다시 좁아진다. 30여분쯤 걸으니 춥다고 느껴지던 몸에 뜨끈한 기운이 돌고 설핏 땀도 비친다. 산길은 쭉쭉 늘씬하게 뻗은 소나무는 아니지만 아기자기하게 키를 키우고 있는 소나무들이 총총 귀엽다. 겨울 찬 기운 아래 코끝을 명징하게 찌르는 소나무향도 좋다.
이마의 땀을 닦고 고개를 들면 곧바로 외남문(보국문)이 보인다. 성 위에 정자처럼 이어진 망루는 거친 숨을 고르기에 ‘딱’ 좋다. 예전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 모두가 성 안으로 통하는 입구였으나 지금은 외남문만이 금성산성의 입구가 되고 있다.
외남문은 서문, 동문과 더불어 최근에 복원한 것인데 외남문을 통과해 바로 고개를 들면 내성과 연결되는 내남문이 있다.
내남문은 ‘충용문’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는데, 산성에서 경관이 가장 뛰어난 곳이다. 이곳에서 보는 담양들판이 널찍하다. 추수를 다 끝낸 논밭은 쓸쓸하지만 나름의 운치가 있다.
구불구불 산줄기도 장쾌하다. 노령의 산줄기에서 갈라져나온 서북쪽 능선은 추월산과 맞닿아 있고 동북쪽에는 산세가 완만하면서도 어깨가 떡 벌어진 장수 같은 무등산이 버티고 있다. 산성은 들판을 모두 아우르는 천혜의 요새다.
삼한시대에 시작해 고려 중기에 완성된 산성은 전체 길이가 7345m. 연대봉, 노적봉, 철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다. 동서남북 빠짐없이 천혜의 장벽을 구축한 이곳은 지리적 조건을 참 잘 활용했다.
그래서일까. 금성산성은 고려 때는 항몽의 격전지였고, 임진왜란 때는 왜병과 맞서 싸우던 전장이었다. 구한말에는 동학군이 거병했던 곳이다. 정유재란 때는 무려 2000명의 병사가 금성산성 전투에서 숨졌다고 한다.
지금도 중앙에 높이 10m의 망루에는 화포가 설치됐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성벽 길은 능선을 따라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해 산행이 여유롭다. 성곽 중간 중간에는 망대(望臺)가 있어 조망하기 좋고 쉬어갈 수 있다.
산성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각종 시설이 불타, 동·서·남·북문의 터만 남았고 한국전쟁 때는 성 안에 있던 금성사가 전소돼 이후 복원됐다. 성 안에는 아직도 우물터, 동헌 터, 돌절구 등의 유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금성산성은 아픈 역사도 담고 있다. 외남문 오른쪽 계곡인 ‘이천골’은 정유재란 때 죽은 조선인과 왜병의 시체 2000구를 계곡에 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마의 땀을 닦고 고개를 들면 곧바로 외남문(보국문)이 보인다. 성 위에 정자처럼 이어진 망루는 거친 숨을 고르기에 ‘딱’ 좋다. 예전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 모두가 성 안으로 통하는 입구였으나 지금은 외남문만이 금성산성의 입구가 되고 있다.
외남문은 서문, 동문과 더불어 최근에 복원한 것인데 외남문을 통과해 바로 고개를 들면 내성과 연결되는 내남문이 있다.
내남문은 ‘충용문’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는데, 산성에서 경관이 가장 뛰어난 곳이다. 이곳에서 보는 담양들판이 널찍하다. 추수를 다 끝낸 논밭은 쓸쓸하지만 나름의 운치가 있다.
구불구불 산줄기도 장쾌하다. 노령의 산줄기에서 갈라져나온 서북쪽 능선은 추월산과 맞닿아 있고 동북쪽에는 산세가 완만하면서도 어깨가 떡 벌어진 장수 같은 무등산이 버티고 있다. 산성은 들판을 모두 아우르는 천혜의 요새다.
삼한시대에 시작해 고려 중기에 완성된 산성은 전체 길이가 7345m. 연대봉, 노적봉, 철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다. 동서남북 빠짐없이 천혜의 장벽을 구축한 이곳은 지리적 조건을 참 잘 활용했다.
그래서일까. 금성산성은 고려 때는 항몽의 격전지였고, 임진왜란 때는 왜병과 맞서 싸우던 전장이었다. 구한말에는 동학군이 거병했던 곳이다. 정유재란 때는 무려 2000명의 병사가 금성산성 전투에서 숨졌다고 한다.
지금도 중앙에 높이 10m의 망루에는 화포가 설치됐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성벽 길은 능선을 따라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해 산행이 여유롭다. 성곽 중간 중간에는 망대(望臺)가 있어 조망하기 좋고 쉬어갈 수 있다.
산성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각종 시설이 불타, 동·서·남·북문의 터만 남았고 한국전쟁 때는 성 안에 있던 금성사가 전소돼 이후 복원됐다. 성 안에는 아직도 우물터, 동헌 터, 돌절구 등의 유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금성산성은 아픈 역사도 담고 있다. 외남문 오른쪽 계곡인 ‘이천골’은 정유재란 때 죽은 조선인과 왜병의 시체 2000구를 계곡에 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20여분 거리에는 기암절벽 아래에 우뚝 서 있는 불상을 볼 수 있다. 국내 유일의 노천법당을 세운 연동사다. 과거 작은 암자였던 연동사는 정유재란 때 이곳에서 죽은 가족 등이 찾아와 향불을 피워 죽은 이들의 넋을 달랬고, 그 행렬이 끊이지 않아 향불의 연기가 구름처럼 깔려 ‘연동사(煙洞寺)’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시간이 여유롭다면 금성산성 오르는 길 입구의 담양리조트도 들러볼 만하다. 리조트는 실내온천탕과 노천탕을 갖췄다.
온천수에는 게르마늄, 스트론튬, 황산이온, 칼슘, 리듐 등 20여종의 성분이 함유돼 있고 이 중 게르마늄은 인체의 혈관을 통해 산소를 공급, 세포 활성화와 피를 맑게 해준다.
특히 이곳 온천수에는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주는 스트론튬이 전국 온천의 평균치보다 3배 정도 많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교차로신문사 / 최명희 기자 cmh@sgsee.com ]
시간이 여유롭다면 금성산성 오르는 길 입구의 담양리조트도 들러볼 만하다. 리조트는 실내온천탕과 노천탕을 갖췄다.
온천수에는 게르마늄, 스트론튬, 황산이온, 칼슘, 리듐 등 20여종의 성분이 함유돼 있고 이 중 게르마늄은 인체의 혈관을 통해 산소를 공급, 세포 활성화와 피를 맑게 해준다.
특히 이곳 온천수에는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주는 스트론튬이 전국 온천의 평균치보다 3배 정도 많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교차로신문사 / 최명희 기자 cmh@sgse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