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조태일시문학기념관과 태안사
곡성 조태일시문학기념관과 태안사
by 운영자 2012.12.28
고여 있지 않고 움직이다
□ 움직이는 시인, 조태일
곡성 태안사 오르는 길에는 ‘깨어있던’ 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이 하나 있다. 조태일(1941~1999) 시인이다. 누구는 그리 익숙지 않은 이름이라 할지 모르지만 굴곡 있는 삶으로, 그만큼 굴곡 있는 시로 목소리를 내던 문학계의 어른이었다.
태안사 요금소를 지나 3분가량 오르면 오른편으로 보이는 것이 조태일시문학기념관. 지난 2003년 시인의 4주기에 개관한 문학관은 시집전시관과 시문학기념관 2곳으로 나눠졌다.
시문학기념관에는 시인이 살아생전 사용하던 가방, 가방, 모자를 비롯한 물건들과 고뇌하며 뜨거운 시를 쏟아내던 책상과 책장 등이 전시됐다.
이곳에는 시인이 사용하던 2000여점의 유품과 시인의 성장과 문학 활동 등을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해뒀다.
기념관 옆의 시집전시관에는 해방 이후 발간된 최남선의 ‘백필번뇌’ 등 희귀본을 비롯 근대시집 등 3000여권의 시집들이 전시됐다.
헌데 왜 하필 문학관이 이곳 깊은 산골, 게다가 절 앞에 만들어졌을까.
<구산(九山)의 하나인 동리산(桐裡山) 속 / 태안사(泰安寺)의 중으로 / 서른다섯 나이에 열일곱 나이 처녀를 얻어> -시 ‘원달리의 아버지’ 일부 -
시인은 곡성 동리산 태안사 아랫마을에서 태안사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인의 아버지는 태안사 주지스님이었다.
<풀씨가 날아다니가 멈추는 곳 / 그곳이 나의 고향 / 그곳에 묻히리 // 햇볕 하염없이 뛰는 언배기면 어떻고 / 소나기 쏜살같이 꽂히는 시냇가라면 어떠리 / 온갖 짐승 제멋에 뛰는 산속이라면 어떻고 / 노오란 미꾸라지 꾸물대는 진흙밭이면 어떠리 / 풀씨가 날아다니가 . 멈출 곳 없이 언제까지나 떠다니는 길목 / 그곳이면 어떠리 / 그곳이 나의 고향 / 그곳에 묻히리> - 시 ‘풀씨’ 전문
시인의 처음과 끝은 바로 이곳 태안사 자락이었다. 이곳에서 났고 또 이곳에서 멸하고 또 살아있기를 원했던 시인. 그러니 ‘꾸꿈스런’ 이곳에 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이 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불의에 부단히 항거하는 ‘투사’였다. 남들과 다른 출생 탓도 있었을 테고 48년 여순반란사건 때 태안사에서 쫓겨나와 광주에서 살게 된 탓도 있었을 테다.
70~80년대 시인은 시를 통해 독재와 싸웠고, 풀뿌리 민중들을 집결시키기 위해 국토의 소중함을 노래했다. 썩고 부조리한 세상에 시인은 시라는 칼로 저항했다. 때문에 시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 69~70년 월간 시전문지 <시인>을 창간했으나 당국의 압력으로 폐간 ▲75년 제3시집 <국토> 긴급조치 9호로 판매 금지 ▲ 77년 양성우 시집 <겨울공화국> 발간 사건으로 투옥 ▲ 79년 자택 옥상에서 유신독재 비판 연설로 투옥 ▲ 81년 평론집 <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 판매 금지 ▲ 83년 제4시집 <가거도> 판매금지.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숨결이 다 타올라 /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후략)> - 시 ‘국토서시’ 일부 -
세밑, 새 대통령이 당선됐다. 더러는 새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드는 이도 있겠지만 앞으로 5년의 새미래를 ‘함께’ 열어갈 일이다. 고여 있지 않고 깨어 움직이며 함께 미래를 열어갈 일이다.
[교차로신문사 최명희 기자 / cmh9630@hanmail.net]
# 태안사는 서민 중심의 선종(禪宗)에서 비롯된 산문(山門)으로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모태가 되고 등뼈를 이룬 절.
이곳은 신라 문성왕 때 만들어진 ‘능파각’(전라남도유형문화재 지정), 고려 초기에 건립된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지정), 일주문 옆 ‘광자대사탑’과 ‘부도비’(보물로 지정) 등 유구한 역사를 지닌 보물들도 즐비하다.
□ 움직이는 시인, 조태일
곡성 태안사 오르는 길에는 ‘깨어있던’ 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이 하나 있다. 조태일(1941~1999) 시인이다. 누구는 그리 익숙지 않은 이름이라 할지 모르지만 굴곡 있는 삶으로, 그만큼 굴곡 있는 시로 목소리를 내던 문학계의 어른이었다.
태안사 요금소를 지나 3분가량 오르면 오른편으로 보이는 것이 조태일시문학기념관. 지난 2003년 시인의 4주기에 개관한 문학관은 시집전시관과 시문학기념관 2곳으로 나눠졌다.
시문학기념관에는 시인이 살아생전 사용하던 가방, 가방, 모자를 비롯한 물건들과 고뇌하며 뜨거운 시를 쏟아내던 책상과 책장 등이 전시됐다.
이곳에는 시인이 사용하던 2000여점의 유품과 시인의 성장과 문학 활동 등을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해뒀다.
기념관 옆의 시집전시관에는 해방 이후 발간된 최남선의 ‘백필번뇌’ 등 희귀본을 비롯 근대시집 등 3000여권의 시집들이 전시됐다.
헌데 왜 하필 문학관이 이곳 깊은 산골, 게다가 절 앞에 만들어졌을까.
<구산(九山)의 하나인 동리산(桐裡山) 속 / 태안사(泰安寺)의 중으로 / 서른다섯 나이에 열일곱 나이 처녀를 얻어> -시 ‘원달리의 아버지’ 일부 -
시인은 곡성 동리산 태안사 아랫마을에서 태안사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인의 아버지는 태안사 주지스님이었다.
<풀씨가 날아다니가 멈추는 곳 / 그곳이 나의 고향 / 그곳에 묻히리 // 햇볕 하염없이 뛰는 언배기면 어떻고 / 소나기 쏜살같이 꽂히는 시냇가라면 어떠리 / 온갖 짐승 제멋에 뛰는 산속이라면 어떻고 / 노오란 미꾸라지 꾸물대는 진흙밭이면 어떠리 / 풀씨가 날아다니가 . 멈출 곳 없이 언제까지나 떠다니는 길목 / 그곳이면 어떠리 / 그곳이 나의 고향 / 그곳에 묻히리> - 시 ‘풀씨’ 전문
시인의 처음과 끝은 바로 이곳 태안사 자락이었다. 이곳에서 났고 또 이곳에서 멸하고 또 살아있기를 원했던 시인. 그러니 ‘꾸꿈스런’ 이곳에 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이 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불의에 부단히 항거하는 ‘투사’였다. 남들과 다른 출생 탓도 있었을 테고 48년 여순반란사건 때 태안사에서 쫓겨나와 광주에서 살게 된 탓도 있었을 테다.
70~80년대 시인은 시를 통해 독재와 싸웠고, 풀뿌리 민중들을 집결시키기 위해 국토의 소중함을 노래했다. 썩고 부조리한 세상에 시인은 시라는 칼로 저항했다. 때문에 시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 69~70년 월간 시전문지 <시인>을 창간했으나 당국의 압력으로 폐간 ▲75년 제3시집 <국토> 긴급조치 9호로 판매 금지 ▲ 77년 양성우 시집 <겨울공화국> 발간 사건으로 투옥 ▲ 79년 자택 옥상에서 유신독재 비판 연설로 투옥 ▲ 81년 평론집 <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 판매 금지 ▲ 83년 제4시집 <가거도> 판매금지.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숨결이 다 타올라 /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후략)> - 시 ‘국토서시’ 일부 -
세밑, 새 대통령이 당선됐다. 더러는 새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드는 이도 있겠지만 앞으로 5년의 새미래를 ‘함께’ 열어갈 일이다. 고여 있지 않고 깨어 움직이며 함께 미래를 열어갈 일이다.
[교차로신문사 최명희 기자 / cmh9630@hanmail.net]
# 태안사는 서민 중심의 선종(禪宗)에서 비롯된 산문(山門)으로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모태가 되고 등뼈를 이룬 절.
이곳은 신라 문성왕 때 만들어진 ‘능파각’(전라남도유형문화재 지정), 고려 초기에 건립된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지정), 일주문 옆 ‘광자대사탑’과 ‘부도비’(보물로 지정) 등 유구한 역사를 지닌 보물들도 즐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