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2인자, 함안 아라가야를 아는가
가야의 2인자, 함안 아라가야를 아는가
by 운영자 2013.02.15
역사는 2인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3인자, 4인자는 더더욱 그렇다. 역사 속에서 가야가 바로 잊힌 존재다.
성산가야(성주), 금관가야(김해), 소가야(고성),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진주), 대가야(고령·합천) 등 6개의 가야가 있었다는 것도 아는 이들보다 모르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가야 6개 왕국의 2인자였던 함안의 아라가야를 찾아 나선다.
하늘 높이 솟은 왕릉, 그 안에 숨쉬는 1500년 전 역사
3인자, 4인자는 더더욱 그렇다. 역사 속에서 가야가 바로 잊힌 존재다.
성산가야(성주), 금관가야(김해), 소가야(고성),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진주), 대가야(고령·합천) 등 6개의 가야가 있었다는 것도 아는 이들보다 모르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가야 6개 왕국의 2인자였던 함안의 아라가야를 찾아 나선다.
하늘 높이 솟은 왕릉, 그 안에 숨쉬는 1500년 전 역사
□ 가야왕국 2인자, 함안 아라가야
주위에 물어봐도 가야왕국에 대해 아는 이들이 없다. 수로왕과 허황후의 이야기를 간직한 금관가야 정도를 아는 것이 전부다. 그도 그럴 것이 가야가 남긴 사료는 없다. 건축물도 없고 그 흔한 사원도 하나 없다.
역사 속에서 잊히고 싶어서였을까 싶지만 아니다. 가장 확실하게 눈에 띄게 하늘 높이 솟은 능이 가야의 존재를 증명한다. 지금까지 이어져 아름다운 선율을 남긴 가야금도 가야를 잊지 않게 한다.
가야왕국 가운데 2인자였던 아라가야는 3세기부터 김해 금관가야와 함께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경상남도 상권 제3편에 <삼국지 한전>에서 ‘김해와 함안 등지는 해상교역을 통해서 예부터 중국 군현과 기타 지역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으며, 울산대 김태식 교수의 <가야의 사회 발전 단계>란 논문에서도 ‘특히 <일본서 흠명기>를 통해 … 후기 가야 13국중 안라국(함안지역)의 왕은 백제왕과 대등하게 병기되기도 하고 다른 소국 지배자들로부터 가야지역의 최고 책임자로 인정되고 있어 안라국이 가야 전체지역에 대한 공동맹주의 지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이처럼 가야왕국과 그 외 소국 가운데서도 주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아라가야는 훗날 백제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고구려와 밀통하는 등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신라에 의해 가장 먼저 병합되고 만다.
□ 하늘 높이 솟은 능 …‘가야를 잊지 말아요’
아라가야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은 함안 시내 중심가의 아라가야고분군.
사적 제515호인 함안군 말이산 아라가야 고분군은 총 287점으로 함안군 가야읍 시가지를 둘러싼 해발 68m의 야트막한 야산인 말이산에 조성됐다.
현재 지정 면적은 52만 5221㎡로 남북으로 뻗어 있는 말이산 주능선과 서쪽으로 낮아지는 작은 능선들을 따라 대형 봉분이 분포하고 있다. 고분 숫자만도 대형 봉분과 현재까지 발굴된 고분 224기를 포함해 1000여 기로 추정된다.
발굴된 유물로는 1992년 마갑총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완전하게 발굴된 말 갑옷(馬甲)을 들 수 있다. 이는 왜에 철기 문명을 전파한 아라가야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
함안 아라가야 고분군은 능선 위로 우뚝 올라섰다. 평지가 아닌 산 능선에 지어진 무덤은 그 능선의 높이만큼 더 봉분을 올렸다.
이 고분군들은 마치 ‘가야를 잊지 말아요’ 하고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가야 왕들의 무덤이 이처럼 높은 곳에 자리한 까닭은 무덤을 높은 곳에 써서 왕의 힘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스스로도 자신의 땅을 굽어보고 싶어서다.
1500년 전 서슬 퍼런 왕들의 무덤이었던 이곳은 지금 공원처럼 이용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운동코스가 되기도 하고, 연인들의 데이트코스가 되기도 한다. 초중고등학생들에게는 소풍 장소로도 쓰일 듯하다.
고분군 옆으로는 함안 박물관이 있다. 그 옛날 아라가야의 역사도 만날 수 있다.
아라가야의 대표적인 유물인 불꽃무늬 토기를 형상화한 박물관에는 불꽃무늬 토기와 수레바퀴 토기, 등잔 토기 등 150여 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1층에 있는 어린이 탁본 체험관에서는 탁본을 뜨고 아라가야 토기를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다. 2층 전시실은 아라가야가 존재했던 연대와 고분군에서 출토된 말 갑옷, 수레바퀴 모양 토기, 불꽃무늬 토기, 문양이 새겨진 뚜껑, 미늘쇠 등 수많은 유적을 볼 수 있다.
제3전시실에서는 삼한, 삼국시대에 함안지역을 주무대로 활동한 아라가야 사람들이 활용한 토기 가마 유적과 마갑총 등이 전시됐다.
한편 함안 아라가야 고분군은 현재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글/사진 : 교차로신문사 최명희 기자 cmh9630@hanmail.net]
주위에 물어봐도 가야왕국에 대해 아는 이들이 없다. 수로왕과 허황후의 이야기를 간직한 금관가야 정도를 아는 것이 전부다. 그도 그럴 것이 가야가 남긴 사료는 없다. 건축물도 없고 그 흔한 사원도 하나 없다.
역사 속에서 잊히고 싶어서였을까 싶지만 아니다. 가장 확실하게 눈에 띄게 하늘 높이 솟은 능이 가야의 존재를 증명한다. 지금까지 이어져 아름다운 선율을 남긴 가야금도 가야를 잊지 않게 한다.
가야왕국 가운데 2인자였던 아라가야는 3세기부터 김해 금관가야와 함께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경상남도 상권 제3편에 <삼국지 한전>에서 ‘김해와 함안 등지는 해상교역을 통해서 예부터 중국 군현과 기타 지역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으며, 울산대 김태식 교수의 <가야의 사회 발전 단계>란 논문에서도 ‘특히 <일본서 흠명기>를 통해 … 후기 가야 13국중 안라국(함안지역)의 왕은 백제왕과 대등하게 병기되기도 하고 다른 소국 지배자들로부터 가야지역의 최고 책임자로 인정되고 있어 안라국이 가야 전체지역에 대한 공동맹주의 지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이처럼 가야왕국과 그 외 소국 가운데서도 주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아라가야는 훗날 백제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고구려와 밀통하는 등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신라에 의해 가장 먼저 병합되고 만다.
□ 하늘 높이 솟은 능 …‘가야를 잊지 말아요’
아라가야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은 함안 시내 중심가의 아라가야고분군.
사적 제515호인 함안군 말이산 아라가야 고분군은 총 287점으로 함안군 가야읍 시가지를 둘러싼 해발 68m의 야트막한 야산인 말이산에 조성됐다.
현재 지정 면적은 52만 5221㎡로 남북으로 뻗어 있는 말이산 주능선과 서쪽으로 낮아지는 작은 능선들을 따라 대형 봉분이 분포하고 있다. 고분 숫자만도 대형 봉분과 현재까지 발굴된 고분 224기를 포함해 1000여 기로 추정된다.
발굴된 유물로는 1992년 마갑총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완전하게 발굴된 말 갑옷(馬甲)을 들 수 있다. 이는 왜에 철기 문명을 전파한 아라가야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
함안 아라가야 고분군은 능선 위로 우뚝 올라섰다. 평지가 아닌 산 능선에 지어진 무덤은 그 능선의 높이만큼 더 봉분을 올렸다.
이 고분군들은 마치 ‘가야를 잊지 말아요’ 하고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가야 왕들의 무덤이 이처럼 높은 곳에 자리한 까닭은 무덤을 높은 곳에 써서 왕의 힘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스스로도 자신의 땅을 굽어보고 싶어서다.
1500년 전 서슬 퍼런 왕들의 무덤이었던 이곳은 지금 공원처럼 이용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운동코스가 되기도 하고, 연인들의 데이트코스가 되기도 한다. 초중고등학생들에게는 소풍 장소로도 쓰일 듯하다.
고분군 옆으로는 함안 박물관이 있다. 그 옛날 아라가야의 역사도 만날 수 있다.
아라가야의 대표적인 유물인 불꽃무늬 토기를 형상화한 박물관에는 불꽃무늬 토기와 수레바퀴 토기, 등잔 토기 등 150여 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1층에 있는 어린이 탁본 체험관에서는 탁본을 뜨고 아라가야 토기를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다. 2층 전시실은 아라가야가 존재했던 연대와 고분군에서 출토된 말 갑옷, 수레바퀴 모양 토기, 불꽃무늬 토기, 문양이 새겨진 뚜껑, 미늘쇠 등 수많은 유적을 볼 수 있다.
제3전시실에서는 삼한, 삼국시대에 함안지역을 주무대로 활동한 아라가야 사람들이 활용한 토기 가마 유적과 마갑총 등이 전시됐다.
한편 함안 아라가야 고분군은 현재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글/사진 : 교차로신문사 최명희 기자 cmh9630@hanmail.net]
함안에는 가요 ‘처녀 뱃사공’ 노래의 흔적을 찾을 수도 있다. 노래의 발상지가 함안군 법수면 악양루 앞의 나루터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은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이 노래는 실화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남강이 흐르는 법수면과 대산면을 잇는 악양나루터에는 처녀 뱃사공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막 끝난 시절 군에 갔다 소식이 끊긴 오빠를 대신해 노를 젓게 됐고 그 사연을 가사로 쓰고 곡을 붙여 1959년 이 노래가 탄생했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은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이 노래는 실화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남강이 흐르는 법수면과 대산면을 잇는 악양나루터에는 처녀 뱃사공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막 끝난 시절 군에 갔다 소식이 끊긴 오빠를 대신해 노를 젓게 됐고 그 사연을 가사로 쓰고 곡을 붙여 1959년 이 노래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