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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 어디서 맞아야 하나

임종, 어디서 맞아야 하나

by 이규섭 시인 2018.08.17

“바람아 고맙다” 낮에는 폭염에 시달리고 밤엔 초열대야에 잠 못 이뤄 뒤척이다 보니 숲에서 불어오는 자연바람에 참외향기가 난다.아파트 숲에서 부는 뜨거운 바람과 숨 막히는 이산화탄소의 도시와는 별천지다. 해마다 떠나는 친인척 피서지에서 휴가의 고마움을 절실하게 느낀다.

소백산자락의 계곡물은 발이 시리도록 차다. 더위에 지친 손자는 평상복 차림으로 물속에 몸을 적신다.

휴가 첫날은 나 홀로 추억의 옛길을 더듬었다. 고향의 산천은 변했고 어릴 적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소식조차 모른다.

계곡 깊숙한 곳 이름 없는 작은 폭포는 소년 시절 즐겨 찾던 나만의 아지트다. 시린 물줄기가 무더위에 지친 바람의 이마를 닦아주듯 청량한 기운을 받던 곳이다.

국립공원 지정 이후 발길이 뜸해 지면서 폭포의 위치는 짐작이 가는데 숲이 우거져 들어갈 수 없다. 부근 계곡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담근다.

서늘한 기운이 발끝을 타고 온몸에 짜릿하게 스며든다. 마을 앞 개울은 고속도로 교각을 세우면서 무참히 파괴됐다.

지형은 변했고 물도 줄었다. 접근조차 쉽지 않아 기억 속의 풍경으로 남는다.

10여 년 이어진 친인척 피서 휴가도 종착점이 가까워지는 것 같다. 나를 포함한 육남매 자녀들인 이종사촌들이 주축이 되어 한해도 거르지 않고 모임을 이어왔다.

육남매 가운데 누군가 먼저 저세상으로 이사를 갈 때까지 모임을 이어가기로 했다.

올해 처음으로 큰 누님과 셋째 누님이 불참했다. 아흔에 접어든 큰 누님은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라 참석하지 못했다. 참석하고 싶다고 했으나 응급상황이 발생할까 봐 말렸다.

셋째 누님은 다리가 불편한데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

여든 중반의 둘째 누님은 한 해가 다르게 건강에 빨간불이 켜졌다. 칠십대 중반의 막내 누나도 황색등이 깜빡인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휴가지서 헤어지며 두 누님께 당부했다. “요양병원 신세 지지 않으려면 건강 잘 챙기시라고.”

요양병원의 필요성은 인정되나 문제점도 만만찮다. 요양병원이 늘어나자 경쟁적으로 환자유치에 나서면서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는 보도다.

환자를 사고파는 ‘인간시장’으로 전락했다니 섬뜩하다. 과잉진료로 수명만 연장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건강하게 살다가 죽고 싶다는 소망이 요양병원 신세 지지 않고 집에서 임종을 맞고 싶은 것으로 바뀌었다.

예전엔 집 밖에서 죽으면 객사(客死)라 하여 자살과 더불어 불행한 죽음으로 간주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도 임종이 가까우면 퇴원했다.

요즘은 장례식을 의식하여 입원시키는 경향이다. 아버지는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에서 운명하셨다. 장남인 나에게 “물이 마시고 싶다”고 했다. 보리차 몇 숟가락을 입에 넣어 드렸더니 입술을 축이고 눈을 감았다.

우리나라 국민 열 명 가운데 일곱 명은 병원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통계다. 방문 진료 시스템이 잘 되어있는 일본은 집에서의 임종이 43%까지 늘어 우리와는 대조적이다.

집에서 편안한 임종을 맞이하려면 방문 진료를 지원하거나, 환자의 통증이나 증상 등을 조절해주는 가정형 호스피스 지원의 확대가 선행돼야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