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보다 중요한 것
일등보다 중요한 것
by 운영자 2016.03.18
작년에 한 노래꾼의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다. 나로서는 생소한 인물이었는데, 알고 보니 신모라는 여가수가 부른 ‘불씨’와 ‘개똥벌레’, ‘터’ 등을 작사 작곡한 이였다.그의 곡들은 대개 남녀 간의 애정을 노래하는 일반 유행가와는 좀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노래를 하나씩 부르면서 사이사이에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 가운데서 초등학교 운동회 때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그는 달리기대회에 나가 일곱 명의 다른 친구들과 함께 뛰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선두였으나 도중에 넘어지고 말았다. 꼴찌로 뒤처지자 창피한 나머지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담임선생님이 계속 뛰라고 재촉을 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끝까지 달렸다. 경기가 끝난 뒤에 담임선생님이 이렇게 격려하시더란다.
“잘했어! 그래도 끝까지 달렸으니까 8등이라도 했잖아. 그만둬버렸다면 그것도 못했을 것 아니냐?”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어차피 꼴찌인데 달리든 말든 뭐가 다를까 의아스러웠단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다보니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남보다 못하니까 아예 그만둘 거야!” 하는 것과 “남보다 못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거야!” 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젠가 신문에서 본 어느 미국인 할머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흔 한 살이나 먹은 할머니가 백혈병 기금 마련을 위해 마라톤에 나가 7시간 7분 42초의 기록으로 풀코스를 뛰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을 접하는 순간, 나는 내심 뜨끔한 데가 있었다. 나도 몇 해 전 마라톤에 나간 적이 있는데, 고작 5킬로미터만 뛰고 말았던 것이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도 풀코스를 뛰는데, 그보다 서른 몇 살이 젊은 내가 그 정도에 만족하고 말았다는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물론 그 할머니의 기록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우승자인 대한민국 황영조 선수의 2시간 13분 23초 기록과는 비교가 안 되는 시간이다. 그러나 할머니에게는 기록이 문제가 아니다.
요양원에 누워 있을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라톤에 도전했다는 사실이 대단하지 않은가. 어려운 형편에 굴하지 않고 전심전력하는 모습, 그 자체가 진한 감동인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1977)라는 글에서, 우연히 본 마라톤 경기의 꼴찌 선수가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모습에 “모든 환호와 영광은 우승자에게 있지만 그는 환호 없이 달릴 수 있기에 더 위대해 보였다”고 말했다.
일등은 아니지만 자기 능력껏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어디 달리기뿐이겠는가. 우리 세상사가 다 마찬가지다. 능력이 좋아서 앞서 가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해 뒤처지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앞서가면 잘난 사람이고, 뒤처지면 못난 사람인가?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지금 우리 세상은 너무 최고지상주의와 일등주의에 빠져 있다. ‘최고가 아니면 최악’이라느니 ‘우승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느니,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느니 하며 최고만을 높이 여기고 나머지는 무시해버리는 일이 많다.
그러다보니 모든 일이 무한경쟁으로 치닫게 되고 여유가 없어진다. 웬만큼 살면서도 상대적 빈곤감으로 인해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실의에 빠지곤 한다.
학업성적 때문에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진 청소년이야말로 이러한 풍조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웃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남의 눈치를 너무 살피는 것도 문제다.
그럴수록 나의 삶이 위축되고 부자유스러워진다. 남이 뭐라 하건 자기 원칙을 가지고 자기 방식대로 살 필요가 있다. 예전의 유행가처럼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닌가.
산속에서 홀로 약초를 캐면서도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라! 욕심 부리지 않고 자신에 충실하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사는 것, 그것이 진정 인간다운 삶이 아니겠는가.
그는 달리기대회에 나가 일곱 명의 다른 친구들과 함께 뛰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선두였으나 도중에 넘어지고 말았다. 꼴찌로 뒤처지자 창피한 나머지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담임선생님이 계속 뛰라고 재촉을 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끝까지 달렸다. 경기가 끝난 뒤에 담임선생님이 이렇게 격려하시더란다.
“잘했어! 그래도 끝까지 달렸으니까 8등이라도 했잖아. 그만둬버렸다면 그것도 못했을 것 아니냐?”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어차피 꼴찌인데 달리든 말든 뭐가 다를까 의아스러웠단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다보니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남보다 못하니까 아예 그만둘 거야!” 하는 것과 “남보다 못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거야!” 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젠가 신문에서 본 어느 미국인 할머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흔 한 살이나 먹은 할머니가 백혈병 기금 마련을 위해 마라톤에 나가 7시간 7분 42초의 기록으로 풀코스를 뛰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을 접하는 순간, 나는 내심 뜨끔한 데가 있었다. 나도 몇 해 전 마라톤에 나간 적이 있는데, 고작 5킬로미터만 뛰고 말았던 것이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도 풀코스를 뛰는데, 그보다 서른 몇 살이 젊은 내가 그 정도에 만족하고 말았다는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물론 그 할머니의 기록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우승자인 대한민국 황영조 선수의 2시간 13분 23초 기록과는 비교가 안 되는 시간이다. 그러나 할머니에게는 기록이 문제가 아니다.
요양원에 누워 있을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라톤에 도전했다는 사실이 대단하지 않은가. 어려운 형편에 굴하지 않고 전심전력하는 모습, 그 자체가 진한 감동인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1977)라는 글에서, 우연히 본 마라톤 경기의 꼴찌 선수가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모습에 “모든 환호와 영광은 우승자에게 있지만 그는 환호 없이 달릴 수 있기에 더 위대해 보였다”고 말했다.
일등은 아니지만 자기 능력껏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어디 달리기뿐이겠는가. 우리 세상사가 다 마찬가지다. 능력이 좋아서 앞서 가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해 뒤처지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앞서가면 잘난 사람이고, 뒤처지면 못난 사람인가?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지금 우리 세상은 너무 최고지상주의와 일등주의에 빠져 있다. ‘최고가 아니면 최악’이라느니 ‘우승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느니,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느니 하며 최고만을 높이 여기고 나머지는 무시해버리는 일이 많다.
그러다보니 모든 일이 무한경쟁으로 치닫게 되고 여유가 없어진다. 웬만큼 살면서도 상대적 빈곤감으로 인해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실의에 빠지곤 한다.
학업성적 때문에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진 청소년이야말로 이러한 풍조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웃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남의 눈치를 너무 살피는 것도 문제다.
그럴수록 나의 삶이 위축되고 부자유스러워진다. 남이 뭐라 하건 자기 원칙을 가지고 자기 방식대로 살 필요가 있다. 예전의 유행가처럼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닌가.
산속에서 홀로 약초를 캐면서도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라! 욕심 부리지 않고 자신에 충실하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사는 것, 그것이 진정 인간다운 삶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