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우의 고전 읽기> 블루 로망 꽃은 비가 되어 내리고 (1)
<장인우의 고전 읽기> 블루 로망 꽃은 비가 되어 내리고 (1)
by 운영자 2016.05.20
- 여인 허난설헌의 삶과 문학을 중심으로
아버지, 저는 오늘 가벼운 산책을 했습니다. 한 여인을 따라서 또 한 여인과 산책을 했습니다. 저를 데리고 좁은 길을 따라 강가로 데려간 여인은 자신을 자운영으로 불러달라 했습니다.작은 얼굴, 작은 몸매, 눈웃음이 귀여운 그녀는 붉은 빛깔의 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단풍 든 듯 곱게 물든 머리카락들이 푸른 나뭇잎들 사이에서 더욱 붉었습니다.
그 옛날 저는 삼단 같은 머리를 곱게 빗어 땋고 붉은 빛깔 댕기를 드려 귀밑머리 날리며 뜰에 피어난 꽃들을 보며 자라났습니다. 되짚어 올 수 없는 시간들이 그리워지는 햇살좋은 오후였습니다.
그 옆에 있던 여인은 키가 제법 컸지만 깡마른 몸매에 어딘지 우수 깃든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매력적인 그녀는 1920년대와 1930년대 뜨겁게 열정적으로 사랑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전라남도 목포의 어느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 영문학부를 다니면서도 연극을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하던 남자를 사랑했다 합니다. 한 때 사람들은 그녀가 현해탄에 그 사내와 몸을 던졌다 아니다 말들이 많았다는데 오늘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자신은 한기주의 삶 역시 사랑했노라’ 말하네요.
아버지, 예전에 받았던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어요.
<한양이 까마득해 애타는 나에게 / 쌍잉어에 편지를 넣어 한강 가에 전해왔네. // 꾀꼬리는 새벽에 울고 시름 속에 비는 오는데 / 푸른 버들은 봄볕 속에 맑게 한들거리네. // 층계에는 푸른 풀이 얽히고 설켜 자라고 / 거문고는 처량하게도 보얀 먼지 속에 한가롭네. // 그 누가 목란배 위의 나그네를 생각하랴 / 광나루에는 마름꽃만 가득 피었네.> - 허난설헌 ‘봄날에 느낌이 있어’
보고 싶었어요. 그리웠어요. 부모님께서는 저를 어여쁜 아이라 매만지시며 기르셨어요. 제가 글을 익히고, 시를 지어낼 적마다 부모님께서는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시며 여러 번 돌려 읽으시고, 내내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오라버님들도 영특하다며 기뻐하시는 표정이 역력했어요. 그렇게 자랄 적에 부모님께서는 ‘공후배필까지야 바랄 수 없지만 군자호구하면 족하겠구나’ 하시며 쓸쓸한 빛을 띄우셨어요. 부모님의 마음이시라 늘 송구스러웠어요.
열다섯 나던 해에 ‘장안유협 경박자를 꿈같이 만나’ 혼례를 치루었어요. 서방님은 늘 바람과 같았어요. 잡힐 듯 잡히지 않았어요. 그런 서방님이지만 어느 날은 봄에 부는 바람 같았어요.
얼어붙었던 대지가 눈을 뜨고, 겨울잠 자던 개구리도 깨어나는 날, 불어오는 바람은 제 가슴을 기대와 설렘으로 부풀게 했어요.
담장 밖 멀리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어나는 날에는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다정한 것이 매서운 시어머님 눈초리에 멍든 응어리를 녹여내고도 남음이 있었어요.
그러나 여름 같은 바람이 불어올 때는 새하얀 모시적삼 식은땀에 적셔지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 목을 타고 가슴 사이까지 흘러내려 후텁지근한 것이 밤이 되어도 타는 듯 더웠어요.
우물가에 나가 두레박 가득 퍼올린 물을 벌컥벌컥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을 만큼 힘겨웠어요.
그러노라면 천연여질(天然麗質) 백년기약하던 얼굴에도 세월이 덧입혀져 가는 것을, 거울이 싫어 보지 않으려 했어요.
아버지, 늘 바람 같은 사람, 종잡을 수 없는 사람, 믿을 수조차 없는 사람인가 싶어 한숨 지을 때 편지가 오면 메마른 가지 물 오르듯 저는 또 피어올랐어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을 때, 멀리서 날아드는 나비처럼 편지 한 장 받으면 그 사람 향 스민 베갯잇자락보다, 그 사람 쓰던 연적보다 더 살뜰한 것이 사무치게 좋았어요.
서방님은 한양에서 친구들과 모여 과거를 위한 공부를 했습니다. 5대(代)째 문과에 급제한 문벌가문인 안동 김씨 자손으로서 공부를 하여 입신양명 꿈을 키우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자연 한양에 가 계시는 날이 많을 수밖에 없고, 글 실력이 다소 낮은 편이니 더욱 정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봄바람 가는 물이 뵈오리 북 지나듯’ 쏜살같이 지나가고, 세상 사람들은 저희 부부를 시기하여 시시때때로 이간질을 하니 저희 부부 더욱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 원망하고 미워한 날보다 그리워한 날들이 더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옥창문에 비쳐드는 달빛이, 침상에서 울고 가는 실솔이 꿈마저 방해하는 가을밤이면 광나루 천지에 지난봄 마름꽃 흰 향이 지치도록 생각나는데…. 아, 우수 깃든 표정의 여인이 노래를 부르네요.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략) - ‘사의 찬미’ 중에서
*허난설헌에 대한 자료는 허경진 님의 ‘허난설헌시집’을 참고했으며, ‘사의 찬미’는 손승휘 님의 소설을 참고로 했습니다. 작가님들께 경의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 옛날 저는 삼단 같은 머리를 곱게 빗어 땋고 붉은 빛깔 댕기를 드려 귀밑머리 날리며 뜰에 피어난 꽃들을 보며 자라났습니다. 되짚어 올 수 없는 시간들이 그리워지는 햇살좋은 오후였습니다.
그 옆에 있던 여인은 키가 제법 컸지만 깡마른 몸매에 어딘지 우수 깃든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매력적인 그녀는 1920년대와 1930년대 뜨겁게 열정적으로 사랑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전라남도 목포의 어느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 영문학부를 다니면서도 연극을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하던 남자를 사랑했다 합니다. 한 때 사람들은 그녀가 현해탄에 그 사내와 몸을 던졌다 아니다 말들이 많았다는데 오늘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자신은 한기주의 삶 역시 사랑했노라’ 말하네요.
아버지, 예전에 받았던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어요.
<한양이 까마득해 애타는 나에게 / 쌍잉어에 편지를 넣어 한강 가에 전해왔네. // 꾀꼬리는 새벽에 울고 시름 속에 비는 오는데 / 푸른 버들은 봄볕 속에 맑게 한들거리네. // 층계에는 푸른 풀이 얽히고 설켜 자라고 / 거문고는 처량하게도 보얀 먼지 속에 한가롭네. // 그 누가 목란배 위의 나그네를 생각하랴 / 광나루에는 마름꽃만 가득 피었네.> - 허난설헌 ‘봄날에 느낌이 있어’
보고 싶었어요. 그리웠어요. 부모님께서는 저를 어여쁜 아이라 매만지시며 기르셨어요. 제가 글을 익히고, 시를 지어낼 적마다 부모님께서는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시며 여러 번 돌려 읽으시고, 내내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오라버님들도 영특하다며 기뻐하시는 표정이 역력했어요. 그렇게 자랄 적에 부모님께서는 ‘공후배필까지야 바랄 수 없지만 군자호구하면 족하겠구나’ 하시며 쓸쓸한 빛을 띄우셨어요. 부모님의 마음이시라 늘 송구스러웠어요.
열다섯 나던 해에 ‘장안유협 경박자를 꿈같이 만나’ 혼례를 치루었어요. 서방님은 늘 바람과 같았어요. 잡힐 듯 잡히지 않았어요. 그런 서방님이지만 어느 날은 봄에 부는 바람 같았어요.
얼어붙었던 대지가 눈을 뜨고, 겨울잠 자던 개구리도 깨어나는 날, 불어오는 바람은 제 가슴을 기대와 설렘으로 부풀게 했어요.
담장 밖 멀리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어나는 날에는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다정한 것이 매서운 시어머님 눈초리에 멍든 응어리를 녹여내고도 남음이 있었어요.
그러나 여름 같은 바람이 불어올 때는 새하얀 모시적삼 식은땀에 적셔지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 목을 타고 가슴 사이까지 흘러내려 후텁지근한 것이 밤이 되어도 타는 듯 더웠어요.
우물가에 나가 두레박 가득 퍼올린 물을 벌컥벌컥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을 만큼 힘겨웠어요.
그러노라면 천연여질(天然麗質) 백년기약하던 얼굴에도 세월이 덧입혀져 가는 것을, 거울이 싫어 보지 않으려 했어요.
아버지, 늘 바람 같은 사람, 종잡을 수 없는 사람, 믿을 수조차 없는 사람인가 싶어 한숨 지을 때 편지가 오면 메마른 가지 물 오르듯 저는 또 피어올랐어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을 때, 멀리서 날아드는 나비처럼 편지 한 장 받으면 그 사람 향 스민 베갯잇자락보다, 그 사람 쓰던 연적보다 더 살뜰한 것이 사무치게 좋았어요.
서방님은 한양에서 친구들과 모여 과거를 위한 공부를 했습니다. 5대(代)째 문과에 급제한 문벌가문인 안동 김씨 자손으로서 공부를 하여 입신양명 꿈을 키우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자연 한양에 가 계시는 날이 많을 수밖에 없고, 글 실력이 다소 낮은 편이니 더욱 정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봄바람 가는 물이 뵈오리 북 지나듯’ 쏜살같이 지나가고, 세상 사람들은 저희 부부를 시기하여 시시때때로 이간질을 하니 저희 부부 더욱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 원망하고 미워한 날보다 그리워한 날들이 더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옥창문에 비쳐드는 달빛이, 침상에서 울고 가는 실솔이 꿈마저 방해하는 가을밤이면 광나루 천지에 지난봄 마름꽃 흰 향이 지치도록 생각나는데…. 아, 우수 깃든 표정의 여인이 노래를 부르네요.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략) - ‘사의 찬미’ 중에서
*허난설헌에 대한 자료는 허경진 님의 ‘허난설헌시집’을 참고했으며, ‘사의 찬미’는 손승휘 님의 소설을 참고로 했습니다. 작가님들께 경의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