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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우의 고전 읽기- 가을, 사과향 스미는 계절이 오면 (1)

장인우의 고전 읽기- 가을, 사과향 스미는 계절이 오면 (1)

by 운영자 2016.07.22

-허난설헌의 삶과 문학을 마치며
난설헌 선생께 가을은 수확, 풍요의 계절이 아니었다. 노오란 은행잎 향기 온 천지를 뒤덮고, 붉은 단풍 천하를 뒤덮는 황홀의 계절도 아니었다.노오란 국화 향기 마당 안을 가득 채워서 오상고절의 덕으로 노래 불리는, 그런 계절도 아니었다. 난설헌 선생께 가을은 ‘인식’의 계절이었을 뿐이다. 쓸쓸함, 고독, 차가운 눈물, 그것이 흘러내린 촛농처럼 굳어지는, 짠 내 나는 인고(忍苦)의 시간이었을 뿐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연극의 막과 장처럼 확연하게 구분되어지고, 그것을 마치 관객이 배우의 표정과 몸짓을 감상하듯 들여다보고 배우가 읊조리는 방백처럼 들어야 하는 ‘인식’의 시간을 시(詩)로 써내려가야 하는 것은 겪어내지 않고는 넘어설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다. 이러한 삶을 시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시간, 그것이 선생께 가을이었다.

선생께서는 가을을 ‘인식’하는 내내 순 임금의 두 비(妃) 아황과 여영을 사모했고, ‘막수’라는 여인을 시적 화자로 삼았을 것이라 가정했을 때, 선생 자신이 ‘막수’를 빌려 가을을 ‘인식’해 갔을 지도 모른다.

<제비처럼 춤추고 꾀꼬리처럼 노래하는데 이름은 막수라네 / 나이 열다섯에 부평후에게 시집왔다네. / 화려한 집에서 거문고를 안고 실컷 타며 / 화관을 즐겨 쓰고 옥황께 예를 올렸네. / 구슬집에 달이 밝으면 퉁소 소이에 봉황새가 내려오고 / 창가에 구름이 흩어지면 거울에 새긴 난새도 걷혀졌네. / 아침저녁으로 단 위에 향을 피우건만/ 학 등에는 찬바람 일어 어느덧 가을일세.> -자수궁에서 자며 여관에게 바치다

시적 화자인 막수는
<우리 집은 석성(호북성 종상현 서쪽에 있던 마을, 막수촌이라 불리게 됨) 아래에 있어 / 석성 바닥에서 낳아 자랐죠./ 시집까지 석성 남정네에게 가고 보니 / 오가며 석성에서 놀게 되었지요> 라고 자신의 이력을 간단하게 말한다.

<내 일찍이 백옥당에 살고 있을 제 / 낭군께선 천리마를 타고 다녔죠. / 석성에 아침 해가 돋을 무렵엔 / 봄 강물에 쌍돛배를 타고 노셨죠.>

고백한다.

그런데 이 고백들은 난설헌 선생의 삶과 많은 부분 오버랩 된다. ‘열다섯에 부평후에게 시집을 왔다’는 부분은 김성립과 부합하고, ‘거문고를 타고 옥황께 예를 올렸다’ ‘ 퉁소 소리에 봉황새 내려오고 거울에 난새는 걷혔네’ 라는 부분 역시 선생의 신선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선생의 삶은 참으로 안타깝고 슬펐다. 한 발자국 다가가면 멀어지고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 임이었지만 늘 그리움으로, 기다림으로 만날 수 있었던 임에 대한 원망과 한탄을 ‘막수’를 빌려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생께서는 순 임금과 아황 여영의 사랑을 사모하였다.

<소상강 굽이 파초꽃은 이슬에 젖고 / 아홉 봉우리에 가을빛 짙어 하늘이 푸르네. / 수궁 찬 물결에 용은 밤마다 울고 / 남방 아가씨 영롱한 구슬 구르듯 하네. / 짝 잃은 난새와 봉황새는 창오산이 가로막히고 / 빗기운이 강에 스며 새벽달 희미하네. / 한가롭게 벼랑 위에서 거문고를 뜯으니 / 꽃 같고 달 같은 큰머리의 강 아가씨가 우네. / 하늘 은하수는 멀고도 높은데 / 일산과 깃대가 오색 구름 속에 가물거리네. / 문밖에서 어부들이 죽지사를 부르는데 / 은빛 호수에 조각달이 반쯤 걸려 있네.> -소상강 거문고 노래

상상해 볼만한 시이다. 가을 파초꽃은 이슬에 함초롬이 적셔 있는, 짙은 가을 하늘 아래 용은 어찌하여 밤마다 우는 것일까? 깊고 맑은 소상강에서 창오의 들판에서 죽은 임금을 찾는 두 여인, 사모하는 정에 통곡하며 빠져 죽었는데, 그 눈물 대나무에 아롱져 흘렀다는데, 밖에서는 어부들의 죽지사(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만들어진 악곡)가 아무렇지도 않게 들려오고 조각달은 무심하게 걸려 있는 시적 상황은 ‘인식’의 시간을 더욱 끓어오르게 하는 고독인지도 모른다.

오류의 시대를 살아 낸 여인들에게 ‘가을’은 가슴을 타고 흐르는 ‘인식’의 강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