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우의 고전 읽기> 가을, 사과향 스미는 계절이 오면 (2)
<장인우의 고전 읽기> 가을, 사과향 스미는 계절이 오면 (2)
by 운영자 2016.08.05
-허난설헌의 삶과 문학을 마치며
나는 왜 가을을 이기지 못한 채 살아왔는가? 나는 왜 가을이 오면 눈물 글썽이며, 가슴 울렁거리며 멀미하듯 살아왔는가? 그러면서도 나는 왜 일 년을 보내며 가을을 기다리고, 가을을 보내며 또 일 년을 기다렸는가? 이제야 알 듯 하다.마흔여덟 해를 간신히 살아내고서야 알 것 같다. 그것은 ‘공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태를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 음력 칠월 중순 너머 ‘그 께’였다.
지금, 음력 칠월 초이틀을 넘어드는 시각, ‘역설’이라는 말을 ‘공존’ 즉 ‘함께’, ‘같이’, ‘존재하기’로 바꾸어내는 계절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문학은 가을을 사랑했다. 가을은 문학을 사랑했다. 나는 가을을 사랑했다. 가을은 나를 사랑했다. 가을은 매미를 사랑했다. 매미는 귀뚜라미를 그리워했고, 귀뚜라미는 매미를 아파했다. 다만,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을 뿐이다.
- 가을, 그 속에서 -
매미는 민중이었을 것이다. 귀뚜라미 역시 민중이었을 것이다. 나는 매미고 너도 매미라면, 나는 귀뚜라미고 너도 역시 귀뚜라미다. 너·나 그래서 우리는 매미일 수밖에, 귀뚜라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가지 거부할 수 없는 진실, 너는 하늘이고 나 역시 하늘이며, 나는 땅이고 너 역시 땅이라는 것이다. 그 가운데 물로 흐르는 것들도 있었다.
그것들은 물로 흐르는 동안 더위에 지친 나의 이마를 씻어주고, 목마른 너의 입술을 축여 주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에게 길을 일러 주고는 뒤돌아 울면서 흘렀다.
두려운 사나이가 있었다.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고 싶어 하던 사나이가 있었다. 그 사나이는 “장수는 ‘충’을 따르고, ‘충’은 백성을 향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왕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사나이는 어머니의 위폐조차 제대로 모시지 못한 불효를 저질렀지만, ‘효’는 ‘충’을 따랐고, ‘충’은 ‘의’로 행해졌다. 그 사나이는 ‘의’로웠다. 그 사나이는 전사한 아비의 군복을 아들에게 전해주며 아들로서의 ‘노릇’을 다하게 했다.
비겁한 자들은 입버릇처럼 ‘의’를 말하고 요구했으나 비겁한 자들은 비열하게 ‘의’를 저버렸다. 적어도 그들은 두려운 사나이 앞에, 전사한 아비의 군복을 입은 아들 앞에 부끄러움을 몰랐다.
목숨에 기대지 않고 노를 저었던 자들, ‘살려는 자 죽을 것이며 죽으려는 자 살 것이다’는 말, 그 외침 앞에 그들은 죽기 위해 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두려움을 용기와 맞바꾼 자들, 그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이 누구였는가? 그들이 누구인가? 백성이다. 하늘이 내려서고 땅이 올라서서 안아올린 자들, ‘백성’, 그들은 ‘민중’이었다.
‘공존’ 이라는 ‘사랑’을 받지 못한 여인이 있었다. 막과 장, 그 안에서 스물일곱 송이 연꽃으로 다시 피어난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처음 아기였고, 초희였고, 소녀였고, 아내였고, 어머니였다. 그 여인은 문학을 사랑했고, 삶을 사랑했고, 가을을 사랑했다.
비단 띠 비단 치마에 눈물자국 겹쳤으니 / 해마다 봄풀을 보며 왕손을 원망해서랍니다. / 아쟁을 끌어다 <강남곡>을 끝까지 타고나자 / 빗줄기가 배꽃을 쳐서 낮에도 문 닫았답니다. / 가을 지난 다락에 옥병풍 쓸쓸하고 / 갈대밭에 서리 지자 저녁 기러기 내리네요. / 거문고 다 타도록 님은 보이지 않고 / 들판 연못에는 연꽃만 떨어지네요.
- 규방에서 원망하다 1, 2
붉은 비단으로 가린 창에 등잔불 붉게 타는데 / 꿈 깨어보니 비단 이불 절반이 비었네요. / 서리 차가운 새장에선 앵무새가 지저귀고 / 섬돌에는 오동잎이 서풍에 가득 떨어졌네요.
- 가을의 한
이 여인 하나를 지켜주지 못하고 오히려 멍에를 씌워 질곡의 세월을 살게 한 나라, 그 시대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의 부끄러운 역사였다.
그동안 허난설헌의 문학을 공부하면서 허경진 님의 한시집을 통으로 읽었습니다. 우리 고전문학의 정수를 이렇게나마 읽을 수 있도록 해 주신 허경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음력 칠월 초이틀을 넘어드는 시각, ‘역설’이라는 말을 ‘공존’ 즉 ‘함께’, ‘같이’, ‘존재하기’로 바꾸어내는 계절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문학은 가을을 사랑했다. 가을은 문학을 사랑했다. 나는 가을을 사랑했다. 가을은 나를 사랑했다. 가을은 매미를 사랑했다. 매미는 귀뚜라미를 그리워했고, 귀뚜라미는 매미를 아파했다. 다만,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을 뿐이다.
- 가을, 그 속에서 -
매미는 민중이었을 것이다. 귀뚜라미 역시 민중이었을 것이다. 나는 매미고 너도 매미라면, 나는 귀뚜라미고 너도 역시 귀뚜라미다. 너·나 그래서 우리는 매미일 수밖에, 귀뚜라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가지 거부할 수 없는 진실, 너는 하늘이고 나 역시 하늘이며, 나는 땅이고 너 역시 땅이라는 것이다. 그 가운데 물로 흐르는 것들도 있었다.
그것들은 물로 흐르는 동안 더위에 지친 나의 이마를 씻어주고, 목마른 너의 입술을 축여 주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에게 길을 일러 주고는 뒤돌아 울면서 흘렀다.
두려운 사나이가 있었다.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고 싶어 하던 사나이가 있었다. 그 사나이는 “장수는 ‘충’을 따르고, ‘충’은 백성을 향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왕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사나이는 어머니의 위폐조차 제대로 모시지 못한 불효를 저질렀지만, ‘효’는 ‘충’을 따랐고, ‘충’은 ‘의’로 행해졌다. 그 사나이는 ‘의’로웠다. 그 사나이는 전사한 아비의 군복을 아들에게 전해주며 아들로서의 ‘노릇’을 다하게 했다.
비겁한 자들은 입버릇처럼 ‘의’를 말하고 요구했으나 비겁한 자들은 비열하게 ‘의’를 저버렸다. 적어도 그들은 두려운 사나이 앞에, 전사한 아비의 군복을 입은 아들 앞에 부끄러움을 몰랐다.
목숨에 기대지 않고 노를 저었던 자들, ‘살려는 자 죽을 것이며 죽으려는 자 살 것이다’는 말, 그 외침 앞에 그들은 죽기 위해 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두려움을 용기와 맞바꾼 자들, 그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이 누구였는가? 그들이 누구인가? 백성이다. 하늘이 내려서고 땅이 올라서서 안아올린 자들, ‘백성’, 그들은 ‘민중’이었다.
‘공존’ 이라는 ‘사랑’을 받지 못한 여인이 있었다. 막과 장, 그 안에서 스물일곱 송이 연꽃으로 다시 피어난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처음 아기였고, 초희였고, 소녀였고, 아내였고, 어머니였다. 그 여인은 문학을 사랑했고, 삶을 사랑했고, 가을을 사랑했다.
비단 띠 비단 치마에 눈물자국 겹쳤으니 / 해마다 봄풀을 보며 왕손을 원망해서랍니다. / 아쟁을 끌어다 <강남곡>을 끝까지 타고나자 / 빗줄기가 배꽃을 쳐서 낮에도 문 닫았답니다. / 가을 지난 다락에 옥병풍 쓸쓸하고 / 갈대밭에 서리 지자 저녁 기러기 내리네요. / 거문고 다 타도록 님은 보이지 않고 / 들판 연못에는 연꽃만 떨어지네요.
- 규방에서 원망하다 1, 2
붉은 비단으로 가린 창에 등잔불 붉게 타는데 / 꿈 깨어보니 비단 이불 절반이 비었네요. / 서리 차가운 새장에선 앵무새가 지저귀고 / 섬돌에는 오동잎이 서풍에 가득 떨어졌네요.
- 가을의 한
이 여인 하나를 지켜주지 못하고 오히려 멍에를 씌워 질곡의 세월을 살게 한 나라, 그 시대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의 부끄러운 역사였다.
그동안 허난설헌의 문학을 공부하면서 허경진 님의 한시집을 통으로 읽었습니다. 우리 고전문학의 정수를 이렇게나마 읽을 수 있도록 해 주신 허경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