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려의 미덕

배려의 미덕

by 운영자 2016.09.22

할리우드 배우 브래드 피트가 나오는 <퓨리(Fury)>(2014)라는 영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과 싸우는 전차부대의 활약상을 그린 작품인데, 그 한 대목이 가끔씩 생각난다. 주인공이 이끄는 소대가 어느 도시를 점령했는데, 한 건물에서 중년 여인과 그의 젊은 딸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소대장과 부하들이 집안 이곳저곳을 살피는데거실에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었다. 평소 그 집 딸이 쓰는 것이었다.

마침 젊은 병사 하나가 피아노를 칠 줄 아는지라 잠깐 곡 하나를 연주하게 된다. 그러자 겁에 질려 있던 그 집 딸의 눈에 생기가 돌며 병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병사 또한 처녀에게 끌린다. 피아노를 매개로 청춘남녀가 금세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 다음 장면이다.

이들의 마음을 알아챈 소대장이 다른 부대원들을 모두 집에서 나가도록 한 다음, 남녀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한다. 그리고 자기는 거실에서 처녀의 어머니와 앉아 그들을 기다린다.

전장에서 피어난 사랑! 따지고 보면 서로 적대적인 처지이지만 그것은 아무런 장벽이 되지 않는다. 만난 지 채 반시간도 안 된 사이지만 그들은 첫눈에 마음이 통하는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란 그렇게 순식간에 타오를 수가 있다.

여기서 인상 깊었던 것은 소대장의 부하에 대한 마음씀씀이다.

전장에 나와 생사의 갈림길을 헤쳐 온 그들에게 이성은 얼마나 목마름의 대상이었겠는가. 소대장은 그것을 헤아리고 있었기에 부하에게 갈증을 풀 기회를 준 것이다.

그것이 전리품을 취하듯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이었다면 비난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 경우는 좀 다르다.

서로 호감을 가진 남녀에게 젊음을 불태울 기회를 허락한 것은 그야말로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닐까. 나는 부하를 배려할 줄 아는 주인공이 참 멋져보였다.

요즘 ‘배려’라는 말이 부쩍 많이 나돌고 있다.

경쟁으로 치닫는 삭막한 현실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일까? 이기심과 경쟁심이 커질수록 인간소외는 증폭되고, 사회의 기반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상생과 공존을 위해서는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식의 회복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첫 발걸음이 바로 나눔과 배려의 실천인 것이다.

그런데 배려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풀 때 더욱 빛난다. 똑같은 행위라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경우에는 다른 뜻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다.

이를 테면 어느 회사의 사장이 식당에서 직원 회식을 마치고 나올 때 거꾸로 놓인 부하직원의 신발을 바로 놓아주었다고 하자. 이것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친다. 그러나 부하 직원이 사장의 신발을 바로 놓아준다면 어떨까? 아마 순수하게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이렇듯 배려는 윗사람에게서 아랫사람으로 향할 때 감동을 주는 만큼 윗사람은 물론이고, 강자는 약자에게, 부자는 빈자에게, 다수는 소수에게 먼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관대함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갑질’이라는 말이 왜 생겨났겠는가?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에서 보듯이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에게 교만한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한 공분이 아니겠는가?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이가 없게 하라!”

가난한 이웃들을 못 본 체 하지 말고 잘 보살피라는 경주 최부잣집의 가훈이다.

‘부자가 3대를 못 간다(富不三代)’는 말이 있지만, 경주 최부잣집은 12대에 걸쳐 300여 년 동안 만석꾼의 명성을 이어왔다.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가훈과 같은 배려의 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영화 <퓨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의 소대가 전차 한 대만 가지고도 수많은 적을 무찌를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말단 병사에게까지 마음을 써준 소대장의 세심한 배려의 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