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우의 고전 읽기 > 안빈낙도 천석고황은 선택인가 도피인가 (1)
장인우의 고전 읽기 > 안빈낙도 천석고황은 선택인가 도피인가 (1)
by 운영자 2016.09.23
- 윤선도가 품은 16~7세기 시가문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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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삼가 보건대, 근래에 전하의 팔다리 노릇을 하고 귀와 눈 역할을 하며 목구멍과 혀 노릇을 하는 관원들이나 일을 논하고 규율과 질서를 세우고 인재를 선발하는 일을 맡은 이들 가운데 이이첨 의 심복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간혹 그들의 무리가 아니면서 한두 사람 사이에 섞여 있는 자들은 반드시 그 사람됨이 무르고 행실에 줏대가 없으며 시세를 살펴 아첨이나 하며 세상 되는 대로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대각(사간원, 사헌부)에서 올리는 말들에 대해 전하께서는 반드시 대각에서 나온 것이라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옥당(홍문관)에서 올리는 간단한 상소문도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전조(이조,병조)의 주의(注擬)) 역시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은근한 암시를 받고서 그렇게 하기도 하고, 직접 지휘를 받아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비록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에게 물어본 뒤에 시행합니다. 관학의 유생에 이르러서도 그 의 파당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관학의 소장(疏章) 또한 겉으로는 곧고 격렬하지만 속은 실 제로 아첨하며 빌붙는 내용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자기편이 아닌 자는 중망을 반 고 있는 자라 해도 반드시 배척하고, 자기와 뜻이 같은 자는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기는 자라도 반 드시 등용합니다.
비록 하나하나 거론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권세를 멋대로 부리고 있는 것이 또한 극도에 이르렀다 하겠습니다.> - 윤선도 「병진소」『고산유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정치관료이면서 학자이고, 시인이었던 고산 윤선도는 고지식한 원리원칙주의자였다.
그는 정직함과 강직함을 지닌 용기 있는 사람이었기에 고통스럽고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지만 그 주변을 맴돌며 성공하려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줄을 잡으려하고, 그 줄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친다.
그들은 외친다. 자신은 순수한 사람이고,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겠으며, 정치발전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절대로 초심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대의 초심은 진정으로 정의로운 것이었냐고. 정의는 무엇이고, 어디에 머물고 있는 것이며, 왜 그곳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말이다.
고산 윤선도 선생은 1587년 선조 20년 6월 22일에 지금의 서울종로구 연지동에 있는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
이후 선생 6세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8세 때에 작은아버지 양자로 입적하게 되면서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의 장손으로의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실제로 선생께서 보길도의 제왕이라 불릴 만큼의 재력을 갖게 했고, 17세 때에 윤돈의 딸 남원 윤씨와 결혼하여 인미, 의미, 예미 세 아들과 딸을 낳으며 청년기를 보낸다. 사실 이 때까지의 선생은 조선 사대부가 자재들의 일반적인 삶을 살았다.
조금 특별하게는 14세 때에 양아버지 윤유기 공이 안변도호부사로 부임해 갔을 당시 수행하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지었다는 한시 세 편 정도를 볼 수 있다.
<온 숲의 나무에 저녁 빛 물들고 / 한 봉우리 단풍나무에 가을 빛 어리네. / 강 안개 멀리 가로질러 깔렸는데 / 저녁 비는 부슬부슬 내려오네.> - 윤선도 「임단 도중에」
<해지는 관로(管路)에 모래 먼지 자욱한데 / 비 갠 남쪽 시내엔 물빛이 새롭구나. / 비로소 변방의 풍토 가까워진 줄 알겠으니 / 사람들 말소리가 남쪽과 달라졌네.> - 윤선도 「안변安邊) 가는 도중에 우연히 읊다」
5언, 7언 절구의 한시가 선생 만년에 지은 시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풋풋한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가을비 내리는 늦은 오후, 강가엔 안개가 자욱하고, 먼 길을 온 사람들은 어디선가 풍겨오는 부침개 냄새에 고향이 더욱 그리울 것이다.
두고 온 사람들이 그리워질 때쯤 귓가에 들려오는 낯선 말소리들, 그 속에서 열네 살 소년은 비로소 자신이 나그네길에 올랐음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청운의 꿈을 안고 들어선 정계는
<진사 민심은 바로 신의 아비와 같이 급제한 사람의 아들인데 이이첨의 유파이며, 신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자입니다. 반시(泮試)가 있기 며칠 전에 신의 친구 전 첨지 송희업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는 신의「사문유취」를 빌려보고자 하였습니다. 신은 전체를 빌려주고 싶지 않아서 몇째 권을 보고자 하는지를 물었더니, 청명절이 들어 있는 권이었습니다. 그 권이 마침 신의 서재에 있었기에 갖다 주었습니다. (중략)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에 간신히 가져올 수 있었는데, 뒷날 반궁의 시험장에 들어갔더니, 바로 ‘유류화’라는 제목이 걸려 있었습니다. 「사문유취」에서 찾아보니 이것은 청명절에 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비로소 이상히 여겨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성상께서 친림하시어 임금의 위엄이 지척에 있는데도 감히 미리 유출했던 제목을 출제하였으니,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이첨이 이렇게까지 되었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 윤선도 「병진소」『고산유고』
초심을 잃은 사람들, 초심이 정의로운 것이었는지를 묻지 않았던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구중궁궐, 숨 막히는 그 곳이 조선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각(사간원, 사헌부)에서 올리는 말들에 대해 전하께서는 반드시 대각에서 나온 것이라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옥당(홍문관)에서 올리는 간단한 상소문도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전조(이조,병조)의 주의(注擬)) 역시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은근한 암시를 받고서 그렇게 하기도 하고, 직접 지휘를 받아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비록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에게 물어본 뒤에 시행합니다. 관학의 유생에 이르러서도 그 의 파당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관학의 소장(疏章) 또한 겉으로는 곧고 격렬하지만 속은 실 제로 아첨하며 빌붙는 내용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자기편이 아닌 자는 중망을 반 고 있는 자라 해도 반드시 배척하고, 자기와 뜻이 같은 자는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기는 자라도 반 드시 등용합니다.
비록 하나하나 거론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권세를 멋대로 부리고 있는 것이 또한 극도에 이르렀다 하겠습니다.> - 윤선도 「병진소」『고산유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정치관료이면서 학자이고, 시인이었던 고산 윤선도는 고지식한 원리원칙주의자였다.
그는 정직함과 강직함을 지닌 용기 있는 사람이었기에 고통스럽고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지만 그 주변을 맴돌며 성공하려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줄을 잡으려하고, 그 줄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친다.
그들은 외친다. 자신은 순수한 사람이고,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겠으며, 정치발전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절대로 초심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대의 초심은 진정으로 정의로운 것이었냐고. 정의는 무엇이고, 어디에 머물고 있는 것이며, 왜 그곳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말이다.
고산 윤선도 선생은 1587년 선조 20년 6월 22일에 지금의 서울종로구 연지동에 있는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
이후 선생 6세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8세 때에 작은아버지 양자로 입적하게 되면서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의 장손으로의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실제로 선생께서 보길도의 제왕이라 불릴 만큼의 재력을 갖게 했고, 17세 때에 윤돈의 딸 남원 윤씨와 결혼하여 인미, 의미, 예미 세 아들과 딸을 낳으며 청년기를 보낸다. 사실 이 때까지의 선생은 조선 사대부가 자재들의 일반적인 삶을 살았다.
조금 특별하게는 14세 때에 양아버지 윤유기 공이 안변도호부사로 부임해 갔을 당시 수행하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지었다는 한시 세 편 정도를 볼 수 있다.
<온 숲의 나무에 저녁 빛 물들고 / 한 봉우리 단풍나무에 가을 빛 어리네. / 강 안개 멀리 가로질러 깔렸는데 / 저녁 비는 부슬부슬 내려오네.> - 윤선도 「임단 도중에」
<해지는 관로(管路)에 모래 먼지 자욱한데 / 비 갠 남쪽 시내엔 물빛이 새롭구나. / 비로소 변방의 풍토 가까워진 줄 알겠으니 / 사람들 말소리가 남쪽과 달라졌네.> - 윤선도 「안변安邊) 가는 도중에 우연히 읊다」
5언, 7언 절구의 한시가 선생 만년에 지은 시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풋풋한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가을비 내리는 늦은 오후, 강가엔 안개가 자욱하고, 먼 길을 온 사람들은 어디선가 풍겨오는 부침개 냄새에 고향이 더욱 그리울 것이다.
두고 온 사람들이 그리워질 때쯤 귓가에 들려오는 낯선 말소리들, 그 속에서 열네 살 소년은 비로소 자신이 나그네길에 올랐음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청운의 꿈을 안고 들어선 정계는
<진사 민심은 바로 신의 아비와 같이 급제한 사람의 아들인데 이이첨의 유파이며, 신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자입니다. 반시(泮試)가 있기 며칠 전에 신의 친구 전 첨지 송희업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는 신의「사문유취」를 빌려보고자 하였습니다. 신은 전체를 빌려주고 싶지 않아서 몇째 권을 보고자 하는지를 물었더니, 청명절이 들어 있는 권이었습니다. 그 권이 마침 신의 서재에 있었기에 갖다 주었습니다. (중략)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에 간신히 가져올 수 있었는데, 뒷날 반궁의 시험장에 들어갔더니, 바로 ‘유류화’라는 제목이 걸려 있었습니다. 「사문유취」에서 찾아보니 이것은 청명절에 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비로소 이상히 여겨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성상께서 친림하시어 임금의 위엄이 지척에 있는데도 감히 미리 유출했던 제목을 출제하였으니,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이첨이 이렇게까지 되었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 윤선도 「병진소」『고산유고』
초심을 잃은 사람들, 초심이 정의로운 것이었는지를 묻지 않았던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구중궁궐, 숨 막히는 그 곳이 조선을 대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