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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우의 고전 읽기> 차고 빔, 오고 감을 너는 염려하지 말라

장인우의 고전 읽기> 차고 빔, 오고 감을 너는 염려하지 말라

by 운영자 2016.12.16

- 고산 윤선도 시가 문학을 탐하다
盈虛去來汝勿虞(영허거래여물우) 빨아들여질 뿐 뱉어지지 않는 슬픔이 있다.

부모와 자식으로 만나 온갖 기쁨과 슬픔, 행복과 안타까움 같은 것을 나누고 채우고 살았지만 어느 순간 길고 긴,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만 순간, 이후 밀려드는 그리움, 외로움으로 인한 상흔, 그것은 뱉어지지 않는, 한사코 안으로만 파고드는 고통일 것이다.

자식을 보낸 아버지, 남겨진 자식에 기대어 살았던 할아버지, 그에게 다가온 영원한 이별, 그것은 한 사내, 노인에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이고 만다.

<스물여섯 젊은이와 칠십 병든 늙은이 / 너 어찌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가? / 나의 재앙 너에게 미쳤으니 어찌 너의 허물이랴? / 하늘을 우러러 봐도 다만 탄식뿐이다.>

고산 선생께서는 스물한 살 때 장남 인미(仁美) 를 얻었고, 스물여섯 되던 해에 차남 의미 (義美)를 얻었다. 두 아들은 매우 명석했다 회고한다. 자라나는 동안 아버지 눈에 벗어남 없이 바르고 영특하여 그 학문이 견줄 이 없었다 한다.

그래서 선생 44세 되던 해엔 두 아들 나란히 생원과 진사를 뽑는 사마시(司馬試) 에 입격하여 주찬(酒饌)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한다. 선생께 두 아들은 마치 소년시절 주남 같은 벗 장자호와 더불어 수학하던 옛 모습을 보는 듯한 기쁨이었으리라.

두 형제가 친족의 돈독함에 벗의 우애 같음을 지니고 청년다운 기개를 뽐낼 때, 아버지 고산의 마음은 그 어떤 것과도 견주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아들이었건만 둘째 아들 의미가 스물다섯 되던 해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애통함을 말할 수 없어 고통스러울 때 의미의 처마저 지아비를 따라가니 남겨진 세 아이를 눈에 담아두는 것 외에 무슨 할 일이 있었으랴. 그러한 심회를 선생께서는 ‘갈바람(서풍)부는 달 밝은 밤이면 어찌 차마 서루(書樓)에 올라보겠는가’ 술회한다.

<너의 아버지 스물다섯에 병들어 이내 죽고 / 지금껏 내 마음엔 슬픔이 얽혔었단다. / 너희 형제에게 의지하니 맑고도 기뻐 / 믿음이 천마의 망아지를 보는 것과 같았다. / 경서의 가르침을 바탕 삼아 쉬지 않고 달리며 / 의리를 추환삼아 얼굴이 환해지네.>

선생의 즐거움과 뿌듯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지난날을 떠올리면 자연히 얼굴에 웃음이 생겨나고 가슴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다. 산 속과 바닷가 집에서 경서의 가르침을 경쟁하듯 배워가며 무수한 전범을 두루 익혀 문채와 풍류를 갖추어 가는 손자들을 바라보며 일찍 떠나간 아들 내외에 대한 미안함을, 문득문득 보고 싶어지는 정을 메워 나가는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천마(天馬驅)의 망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한다. 그 귀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음을 비유한 말일 것이다. 세상에 자식보다 귀한 것은 없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이름이 자식 아니던가.

<유분(劉賁)처럼 사책(射策)에서 충을 수(輸)에 비겼고 / 강총(江摠)처럼 외가에서 마당 둘레를 달렸다네. / 이별에 즈음해 내 묵은 병 나은 것은 기뻐할 만했지만 / 오히려 둘째 손자가 다시 몸에 병이 들까 염려스러웠네. / 병들었다 곧 회복된 것 내 생각과 어긋난 것이었으니 / 노로 하여금 이렇게 가게 하니 내 살을 베는 듯하구나. >

선생의 애달픔이 배어나는 순간이다. 7세에 고아가 되어 외가에서 자라며 총명하여 외숙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강총에 견줄 만큼 총명했던 아이였다. 경서의 뜻풀이나 여러 국가정책에 관한 문제들을 여러 개의 댓조각에 하나씩 써서 늘어놓고 응시자가 하나씩 쏘아 맞히게 하고 그 댓조각에 나온 문제에 대한 답을 쓰게 한 과거와 같은 시험에도 합격할 만한 실력을 지닌 손자 이구(爾久)를 잃은 칠십 노인의 아픔이 짙게 배어 나온다.

어린 손녀 둘을 남기고 총총히 떠난 손자를 아파하면서도 차고 빔을, 가고 옴을 염려하지 말라고 위안의 말을 전한다. ‘나 또한 슬픔을 거두고 천지에 맡겨 두련다’라고 읊조린다. ‘지금 천지를 커다란 화로로 여기고, 조화를 훌륭한 대장장이로 생각한다면 어디로 가든 좋지 않겠는가(今一以天地爲大爐 以造化爲大治 惡乎住而不可哉) -莊子 ‘大宗師’

떠나는 이의 불효의 망극함은 자연의 이치일 뿐이라고,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순리라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슬픔이 처연하게 느껴진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