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工夫)
공부(工夫)
by 운영자 2017.01.03
요즘 사람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말이 ‘언제 청문회 하지? 누가 증인으로 나오지? 이번 주말에 서울 갈 거야?’라고 한다. 또 그 때문에 시간이 번개처럼 지나가서 하루가 짧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즐겁고 보람찬 삶을 살고 있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는데, 그렇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방화, 세월호 침몰 등의 비극은 왜 계속되는 것일까?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어쩌면 우리는 비극의 역사를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더 끔직한 것은 새로운 후생들도…….
요즘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학교로, 학원으로 끝없는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과거에 비해 많은 사람들, 특히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들까지 공부하는데 시간을 쓰고 있다.
이런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더 잘 살기 위해서다. 그 첩경이 공부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공부란 무엇일까? 공부(工夫)는 외우고 점수를 올려서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그 자체’다. 흔히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은 왜 이러지?’라고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어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흉내를 내는 것이다. 어쩌면 어른들이 보이는 시범을 따라 한 죄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공부(工夫)’가 알고 기억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어른들의 시범’은 멀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요구되는 때이다. 앎이란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공부의 진정성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무엇을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우리가 하는 공부에서의 문제점은 아닐까?
세상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은 뜻으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은 그것을 그냥 흘려보낼 뿐이다. 사회나 조직도 뜻이 교차하는 무대인 것이다. 뜻이란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은 뜻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처럼 나라도, 학교, 가정도 그 뜻에 의해 그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부한 사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부드러워야 한다. 말, 행동, 자세, 태도, 표정이 부드러워야 한다. 만나서 하는 인사가 그 사람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처럼, 시선, 눈빛, 손짓, 말투, 목소리가 그 사람의 공부 정도를 가늠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아이들은 그 문화에 젖어야 한다.
잘 살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증가하는데, 왜 일상에서 비극은 계속되는 것일까? 그 원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도덕의 기준은 점수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행해지는 바른 말과 행동인 것이다. ‘위대한 제국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들어진다’는 크세노폰의 이야기를 곳곳에 걸고 행동으로 반복해야 하지 않을까?
교실에서 공부한 내용이 삶 속에서 행동으로 표출돼야 한다. 즉, 공부의 기준은 일상생활에서의 말과 행동이 돼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세상이 학교가 돼야 한다. 배운 공부가 삶 속에서 실천되고 강화돼야 하며, 그러한 행동이 개인에게 기쁨과 삶의 가치가 돼야 한다.
어린 동물의 생존과 홀로서기 역량도 어미들의 시범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어른들의 시범이 선행돼야 하고, 그 시범 속에서 소망하는 삶이 체화되고 대를 이을 수 있도록 모두가 나서야 한다. 생활에서 비극의 고리를 끊는 어른들의 시범이 필요하다. 그래서 학교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이 학교인 것이다.
‘敎’의 음과 훈을 흔히 ‘가르칠 교’라고 보통 가르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본받는다’는 의미인 ‘본 받을 교’라는 뜻이 더 강하다.
그래서 ‘교사’의 의미도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뜻이 더 강한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학교를 다니고 책을 읽고 스승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삶의 뜻을 알고자 함일 것이다. 그런데 그 뜻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말과 행동에 객관성이 없으면 뜻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사는데, 거기에는 담긴 뜻이 있을 것이다. 그 꿈의 뜻이 무엇이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방법에는 타당성이 전제돼야 함을 뜻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것은 자신이 자연과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지를 묻고, 그렇지 않으면 고쳐나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곳을 세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뜻을 알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나로 살면서 나의 뜻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뜻이 무엇일까? 그 뜻을 이루기 위한 나의 일상은 어떤 뜻과 과정으로 채워져야 할까?
공부는 세상과 삶에 대한 섭리, 즉 지혜를 학생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의 의미도 ‘學校’보다는 ‘學敎’로 가야하지 않을까?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방화, 세월호 침몰 등의 비극은 왜 계속되는 것일까?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어쩌면 우리는 비극의 역사를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더 끔직한 것은 새로운 후생들도…….
요즘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학교로, 학원으로 끝없는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과거에 비해 많은 사람들, 특히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들까지 공부하는데 시간을 쓰고 있다.
이런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더 잘 살기 위해서다. 그 첩경이 공부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공부란 무엇일까? 공부(工夫)는 외우고 점수를 올려서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그 자체’다. 흔히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은 왜 이러지?’라고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어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흉내를 내는 것이다. 어쩌면 어른들이 보이는 시범을 따라 한 죄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공부(工夫)’가 알고 기억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어른들의 시범’은 멀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요구되는 때이다. 앎이란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공부의 진정성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무엇을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우리가 하는 공부에서의 문제점은 아닐까?
세상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은 뜻으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은 그것을 그냥 흘려보낼 뿐이다. 사회나 조직도 뜻이 교차하는 무대인 것이다. 뜻이란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은 뜻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처럼 나라도, 학교, 가정도 그 뜻에 의해 그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부한 사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부드러워야 한다. 말, 행동, 자세, 태도, 표정이 부드러워야 한다. 만나서 하는 인사가 그 사람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처럼, 시선, 눈빛, 손짓, 말투, 목소리가 그 사람의 공부 정도를 가늠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아이들은 그 문화에 젖어야 한다.
잘 살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증가하는데, 왜 일상에서 비극은 계속되는 것일까? 그 원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도덕의 기준은 점수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행해지는 바른 말과 행동인 것이다. ‘위대한 제국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들어진다’는 크세노폰의 이야기를 곳곳에 걸고 행동으로 반복해야 하지 않을까?
교실에서 공부한 내용이 삶 속에서 행동으로 표출돼야 한다. 즉, 공부의 기준은 일상생활에서의 말과 행동이 돼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세상이 학교가 돼야 한다. 배운 공부가 삶 속에서 실천되고 강화돼야 하며, 그러한 행동이 개인에게 기쁨과 삶의 가치가 돼야 한다.
어린 동물의 생존과 홀로서기 역량도 어미들의 시범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어른들의 시범이 선행돼야 하고, 그 시범 속에서 소망하는 삶이 체화되고 대를 이을 수 있도록 모두가 나서야 한다. 생활에서 비극의 고리를 끊는 어른들의 시범이 필요하다. 그래서 학교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이 학교인 것이다.
‘敎’의 음과 훈을 흔히 ‘가르칠 교’라고 보통 가르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본받는다’는 의미인 ‘본 받을 교’라는 뜻이 더 강하다.
그래서 ‘교사’의 의미도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뜻이 더 강한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학교를 다니고 책을 읽고 스승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삶의 뜻을 알고자 함일 것이다. 그런데 그 뜻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말과 행동에 객관성이 없으면 뜻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사는데, 거기에는 담긴 뜻이 있을 것이다. 그 꿈의 뜻이 무엇이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방법에는 타당성이 전제돼야 함을 뜻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것은 자신이 자연과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지를 묻고, 그렇지 않으면 고쳐나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곳을 세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뜻을 알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나로 살면서 나의 뜻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뜻이 무엇일까? 그 뜻을 이루기 위한 나의 일상은 어떤 뜻과 과정으로 채워져야 할까?
공부는 세상과 삶에 대한 섭리, 즉 지혜를 학생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의 의미도 ‘學校’보다는 ‘學敎’로 가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