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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우의 고전읽기 >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결이 느껴진 곳에(4)

장인우의 고전읽기 >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결이 느껴진 곳에(4)

by 운영자 2017.03.10

- 해옹(海翁) 윤선도의 인생 2막을 찾아서

적막한 거친 밭 곁에 / 번성한 꽃이 약한 가지 누르고 있네.
장맛비 그쳐 향기 가벼워라 / 보리 바람을 띠어 그림자 쓰러졌네.
수레나 말 탄 사람 그 누가 보아주리 / 벌이나 나비만이 한갓 서로 엿보네.
태어난 땅 천한 것 스스로 부끄럽고 / 사람들 버려둔 것 그저 한스러워라.
- 최치원 촉규화」
이 시인은 천재였다. 열두 살에 고국인 신라를 떠나 당나라에 유학하고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또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쾌거를 이루었다.그러나 이 천재 시인은 ‘벽’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시인은 변방의 작은 나라 출신의 문객이었을 뿐이다. 결국 고국으로 돌아와 큰 포부와 꿈을 펼치려 했지만 골품제, 6두품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자 인재개발과 인재육성에 기반을 둔 정치 개혁안 시무10조를 올리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그것은 ‘벽’이었다.

천재 시인은 떠났다. 그가 떠난 곳은 가야산이었고, 그곳은 조선 8경 중 가을 단풍과 겨울 설경이 빼어난 곳이었다. 그곳에 고산 윤선도 선생이 1635년 겨울 초입 무렵에 찾아갔다. 75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찾아 나선 것이다.

가야산 신선 떠난 지 이미 천 년인데 / 가야산에서 이 신선을 찾으니 웃을 만하네.
시문 지으며 잔 띄운 일 빼어난 행적 아니었으니 / 이 모두가 인세를 피하는 데 있었음을 알겠네.
한 해 저물 무렵 좋은 경치 이리저리 찾으나 / 단풍도 없고 꽃도 없어 한스러워라.
온 봉우리 하룻밤에 주옥(珠玉)으로 단장하니 / 뭇 신선 대접이 후한 줄 이제야 알겠네.
-윤선도 가야산에 유람하다 2수」

고산(孤山)은 고운(孤雲) 에게서 자신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씻을 수 없는 더 큰 상처를 아직 마주하지 않은 사나이 고산에게 이 때 이 만남은 차라리 ‘낭만’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이를 질박하고도 공교하게 만들어 내었던가? / 자유롭고 분방함은 조화옹에게서 말미암았구나!

해를 곁에 두고 바람에 임하니 구름 골짝 같고 / 집은 그윽하고 지세는 험하여 바위 가운데 빼어나네. / 옥구유에 나는 폭포 향기로운 안개 꿰뚫고 / 돌단지의 차가운 못 푸르른 하늘 비치네.

십 리의 봉호(蓬壺)는 하늘이 내리신 영토이니 / 비로소 내 길이 완전히 막히지 않을 줄 알겠네.

-윤선도 황원잡영-1수

첫 만남, 첫 순간은 황홀하고 아름다운 것이 위대하기까지 하다. 무릉도원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폭풍 같은 시간을 어떻게 휘말려 왔는지 모르는 사나이에게 이곳의 풍경은 더 이상 꿈 꿀 수 없는 신선의 세계였다. 천 년 전에 신선이 되었다는 이가 처음 도달했던 그곳도 이곳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질박함’, ‘공교함’ 장인의 솜씨가 아니면 탄생하기 어려운 경지의 것이다. 티끌 하나도 용납할 수 없는, 미세한 흔들림조차도 인정할 수 없는 경지, 이미 인간의 것을 뛰어넘은 것이다. 이것을 시인은 조화옹의 것이라고 말한다.

깎아지른 험준한 바위골짝 사이로 집들이 모여 있고, 눈앞에 펼쳐진 폭포의 위용은 옥으로 빚은 구유에서 날아올라 안개를 꿰뚫는 듯 하다 찬탄한다.

보길도 부용동은 선생에게 십 리의 봉호(蓬壺), 하늘이 내려 준 영토가 되는 것이다.

봉래(蓬萊)에 잘못 들어 홀로 신선을 찾는데 / 물(物)마다 맑고 기이하며 낱낱이 신묘하네.

가파른 절벽에는 천고의 뜻 말없이 담겼고 / 드넓은 수풀에는 사철 봄이 막히어 둘렀네.

어이 알랴? 오늘 바위 굴 속 나그네가 / 훗날 그림 속의 사람 되지 않을는지.

속세의 떠드는 소리야 어찌 족히 말하랴만 / 돌아갈 생각하니 신선들 성낼까 두렵네.
윤선도 황원잡영- 2수」

하늘이 내려 준 영토, 그 위에 선 시인은 떠올렸다. 천 년 전 가야산을 떠난 신선을 만나겠다고 찾아 나섰던 2년 전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가슴 부푼 꿈을 감아올린다. 단풍도 꽃도 없는 곳에서 신선을 그리는 우생(優生)에게 신선은 하룻밤 사이 주옥으로 단장한 봉우리로 화답해 주었던 그 날의 신비를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 역시 보길도 부용동의 신선이 되어 찾아드는 나그네를 그린다. 속세의 떠드는 소리는 멀수록 좋고 돌아가면 신선이 성낼까 두려워 그림이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하늘의 소리로 받아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