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만의 은사님
반세기만의 은사님
by 운영자 2017.06.05
선생님! 참 오랜만이었습니다.건강한 모습을 뵐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그간 세월이 꽤 흘렀지요? 우리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가 1967년이었으니 올해 딱 50주년이 됩니다. 금년 곡성에서 갖는 동창 모임에는 선생님을 모셔보자는 의견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는데, 쾌히 승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사님 초대야 어느 동창회나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반세기나 지나서 은사님을 모신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이게 다 선생님이 건강하신 덕분이 아니겠어요?
사실 선생님을 뵙기 전에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짐작이 잘 안 되더군요. 예전 학창시절의 인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여든이 되신 모습이 얼른 그려지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선생님을 뵙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정정하실 수가! 이마의 주름살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화색이 가득한 얼굴이며, 훌쩍한 키며, 우리를 반기는 구수한 목소리가 옛날이랑 다름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기억력이었지요. 우리를 보시자마자, “너 신평 살았지야?”, “너의 누나 이름이 숙자였지야?”, “너의 아버지가 상주씨 아니었냐?”하고 바로바로 짚어내시는 데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머리에 서리가 앉은 제자들을 일일이 알아보신 것은 그만큼 관심과 애정이 깊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덕분에 우리는 세월의 장벽을 뛰어넘어 금방 옛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지요.
선생님은 1960년대 중반에 우리 담임을 맡으셨습니다. 그 때 우리 꼬맹이들 눈에는 나이가 무척 많아 보였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던가 봐요. 사범학교를 나와 우리 학교에 첫 발령을 받으셨다니까 팔팔한 20대 청년이었겠지요.
우리는 선생님께 먼저 배운 선배들로부터 선생님이 대단한 실력파라는 평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졸업반 담임을 주로 맡으신 것으로도 알 수 있었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호랑이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용서가 없다고 하니, 담임 소식을 접하는 순간, ‘아이고,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잘못한 경우에는 가차 없었지만 열심히 하면 그만큼 아껴주기도 하셨으니까요.
그 시절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지요. 시험에 떨어지면 진학을 못 하기 때문에 초등학생들도 요즘 고3 학생처럼 머리를 싸매야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농촌은 도무지 공부할 형편이 아니었어요.
집에 공부방은커녕 책상이나 책꽂이 하나 갖춰지지 않았고, 학교만 다녀오면 책보자기 던져놓고 곧장 꼴망태를 둘러메고 소를 뜯기든지, 아니면 지게를 짊어지고 산에 땔나무를 하러 가기에 바빴거든요.
그런 우리를 선생님은 수업 끝나고 학교에 남도록 했지요. 그리고 밤늦도록 호롱불 아래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요즘 말로 야간 보충수업을 한 것이지요. 특근수당이나 수업수당 같은 것도 없던 시절에 제자들을 위해 젊은 열정을 불태운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중학교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지요.
당시 네댓 개나 되는 관내 초등학교 가운데서 우리 학교의 합격률이 가장 높고, 고득점자가 많이 나온 것은 누구나 인정했던 선생님의 공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껏 선생님의 은공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코흘리개들이었지만 어찌 그 뜨거운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동창회 날 우리는 선생님을 모시고 곡성기차마을과 압록을 거쳐 구례온천에서 저녁식사와 숙박을 했습니다. 제자들과 지내며 불편해하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놀랍게도 선생님은 식사도 거뜬히 하시고, 약주도 사양하지 않으시고, 노래방에서 <일편단심 민들레야>도 멋들어지게 뽑으시며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오히려 건강을 염려해서 음식을 가리고, 술도 줄이고 지내는 우리가 낯이 뜨거워지더군요.
평소 선생님은 ‘일십백천만’을 실천하신다지요. 하루에 한 가지씩 좋은 일을 하고, 날마다 열 사람씩을 만나며, 매일 백 자의 글을 쓰고, 천 자의 글을 읽으며, 만 보씩 걸으신다는 말씀, 선생님의 건강은 바로 이와 같은 철저한 자기관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선생님은 무언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팔순에 이르도록 꿋꿋함을 잃지 않으신 그 자체가 제자들에게는 큰 가르침이었습니다.
선생님처럼 우리도 건강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요즘 백세 시대라고들 하는데, 부디 백 살까지 사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존경하는 최춘기 선생님! 건강하게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에 또 모시겠습니다.
그간 세월이 꽤 흘렀지요? 우리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가 1967년이었으니 올해 딱 50주년이 됩니다. 금년 곡성에서 갖는 동창 모임에는 선생님을 모셔보자는 의견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는데, 쾌히 승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사님 초대야 어느 동창회나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반세기나 지나서 은사님을 모신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이게 다 선생님이 건강하신 덕분이 아니겠어요?
사실 선생님을 뵙기 전에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짐작이 잘 안 되더군요. 예전 학창시절의 인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여든이 되신 모습이 얼른 그려지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선생님을 뵙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정정하실 수가! 이마의 주름살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화색이 가득한 얼굴이며, 훌쩍한 키며, 우리를 반기는 구수한 목소리가 옛날이랑 다름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기억력이었지요. 우리를 보시자마자, “너 신평 살았지야?”, “너의 누나 이름이 숙자였지야?”, “너의 아버지가 상주씨 아니었냐?”하고 바로바로 짚어내시는 데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머리에 서리가 앉은 제자들을 일일이 알아보신 것은 그만큼 관심과 애정이 깊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덕분에 우리는 세월의 장벽을 뛰어넘어 금방 옛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지요.
선생님은 1960년대 중반에 우리 담임을 맡으셨습니다. 그 때 우리 꼬맹이들 눈에는 나이가 무척 많아 보였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던가 봐요. 사범학교를 나와 우리 학교에 첫 발령을 받으셨다니까 팔팔한 20대 청년이었겠지요.
우리는 선생님께 먼저 배운 선배들로부터 선생님이 대단한 실력파라는 평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졸업반 담임을 주로 맡으신 것으로도 알 수 있었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호랑이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용서가 없다고 하니, 담임 소식을 접하는 순간, ‘아이고,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잘못한 경우에는 가차 없었지만 열심히 하면 그만큼 아껴주기도 하셨으니까요.
그 시절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지요. 시험에 떨어지면 진학을 못 하기 때문에 초등학생들도 요즘 고3 학생처럼 머리를 싸매야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농촌은 도무지 공부할 형편이 아니었어요.
집에 공부방은커녕 책상이나 책꽂이 하나 갖춰지지 않았고, 학교만 다녀오면 책보자기 던져놓고 곧장 꼴망태를 둘러메고 소를 뜯기든지, 아니면 지게를 짊어지고 산에 땔나무를 하러 가기에 바빴거든요.
그런 우리를 선생님은 수업 끝나고 학교에 남도록 했지요. 그리고 밤늦도록 호롱불 아래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요즘 말로 야간 보충수업을 한 것이지요. 특근수당이나 수업수당 같은 것도 없던 시절에 제자들을 위해 젊은 열정을 불태운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중학교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지요.
당시 네댓 개나 되는 관내 초등학교 가운데서 우리 학교의 합격률이 가장 높고, 고득점자가 많이 나온 것은 누구나 인정했던 선생님의 공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껏 선생님의 은공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코흘리개들이었지만 어찌 그 뜨거운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동창회 날 우리는 선생님을 모시고 곡성기차마을과 압록을 거쳐 구례온천에서 저녁식사와 숙박을 했습니다. 제자들과 지내며 불편해하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놀랍게도 선생님은 식사도 거뜬히 하시고, 약주도 사양하지 않으시고, 노래방에서 <일편단심 민들레야>도 멋들어지게 뽑으시며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오히려 건강을 염려해서 음식을 가리고, 술도 줄이고 지내는 우리가 낯이 뜨거워지더군요.
평소 선생님은 ‘일십백천만’을 실천하신다지요. 하루에 한 가지씩 좋은 일을 하고, 날마다 열 사람씩을 만나며, 매일 백 자의 글을 쓰고, 천 자의 글을 읽으며, 만 보씩 걸으신다는 말씀, 선생님의 건강은 바로 이와 같은 철저한 자기관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선생님은 무언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팔순에 이르도록 꿋꿋함을 잃지 않으신 그 자체가 제자들에게는 큰 가르침이었습니다.
선생님처럼 우리도 건강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요즘 백세 시대라고들 하는데, 부디 백 살까지 사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존경하는 최춘기 선생님! 건강하게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에 또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