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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문화라고?

그깟 문화라고?

by 운영자 2017.12.05

겨울의 문턱에서 떠오르는 게 참 많다.우선 어릴 적 고향집의 따뜻한 아랫목이다. 그다음에 눈 내린 산사 추녀 끝에 매달린 고드름, 마을 어귀 장작불을 지펴 굽는 고구마 아저씨가 그 뒤를 잇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제 만나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니 언제부터인가 우리 스스로 내쫓아낸 것들인지도 모른다.

서로의 정을 나누며 서로 아끼고 도와가며 살아가는 우리네 문화가 사라진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아등바등하며 얻으려 한 돈이 전보다 훨씬 많은데도 말이다.

백범 선생의 ‘우리의 소원’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 원하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중략)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백범 선생이 이 말을 한때가 혼란스러운 해방공간기인 1947년 무렵이다.

어쩌면 선생은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염려하여 이 말을 했던 것 같다. 마음 아프게도 우리는 선생의 염려대로 고도의 압축성장 끝에 따뜻한 문화 대신 돈을 선택했고, 그 후유증을 아직까지 심하게 앓고 있다.

아니 언제 회복될지 모르는 채로 중독증은 더 심해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경제는 '존재의 문제'지만 문화는 '어떻게 존재하느냐'의 문제다. 다시 말해 경제는 생존의 문제지만 문화는 삶의 질의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문화는 삶의 질을 다루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방치되고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삶의 질을 다루는 문화는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최종적 담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고난 불행을 딛고 성공한 헬렌 켈러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다. "앞을 볼 수 없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헬렌 켈러는 이렇게 답했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보다 더 불행한 자는, 눈으로 앞은 보지만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이지요." 생물학적인 시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긴 안목이다.

그 안목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문화이다. 문화야말로 창의적 통찰과 진정한 삶의 즐거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땀을 흘리며 경제활동을 하는 이유는 결국 문화의 향유를 위한 것이다.

문화예술활동은 물론 여행문화, 나눔봉사문화 등 나열하자면 문화의 영역은 끝이 없다.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내가 하고 싶은 취미 활동도 당연히 그 안에 있다.

정리해보면 우리 삶의 목적은 어쩌면 행복이 아닌 문화의 향유에 있는지도 모른다.

행복은 그 부산물에 불과하고.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의 미래는 여가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여가야말로 인간이 문화적인 삶을 즐기고 누리는 시간이 아니던가.

여기에서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맹자에 나오는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이다.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 이치 그대로 문화예술인 중엔 배가 고파 힘들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문화예술에 대한 배려와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문화는 우리의 삶의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이고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미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