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씨를 품은 텃밭을 지키다
감자씨를 품은 텃밭을 지키다
by 권영상 작가 2018.04.19
텃밭에 감자씨를 심고 나니 안성을 떠날 수 없다. 아내를 먼저 서울로 보내고 나는 여기 홀로 남았다. 감자씨만이 아니라 씨토란이며 마도 심었다.이들을 밭에 내고 싶은 마음에 겨울이 길어지는 게 싫었다. 감자는 몇 해 심어봤지만 토란은 지난해가 처음이다. 그야말로 일면식 없는 작물이었다. 우연히 종묘 가게 주인의 권유로 심었는데 그 멋이 일품이다.
키가 나를 능가했다. 넉넉하고 둥근 초록잎, 그리고 늦여름이면 피어주는 카라를 닮은 멋진 꽃.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릴 줄 아는 유연함과 폭양을 가려주는 그늘, 비 내리면 들려주던 토란잎 노래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다 좋았다.
토란을 심어놓고 나는 긴 여름 내내 비를 기다리며 살았다.
추석을 앞두고 드디어 토란을 캤다. 그때에야 알았다. 내가 가꾼 것이 알토란이라는 걸. 잘 익은 야자 덩이만한 알토란이 땅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오래 관계를 한 지인들에게 그걸 보냈다. 나도 모르는 토란 요리법을 읽은 대로 적어 함께 보낼 때의 그 기쁨이라니!
올해에 새로 발굴한 품종마다. 꼭 식탁 위에 올리자는 뜻으로 선택한 건 아니다. 낯선 작물과 만나고 그들의 심성을 살려 나가는 재미 때문이다. 늘 새로운 작물을 키워보지만 처음 재배할 때만큼 잘 된 적이 없다.
그만큼 몰입하기 때문이다. 마는 가을에 수확할 수 있는 성숙한 둥근 마의 절편을 심기로 했다. 석회 거름을 좋아하는 마를 위해 뜰 안의 메리골드 해바라기 백일홍 돼지감자 마른 꽃대를 태운 재거름을 준비했다.
이제 한 이틀 지나면 심으려 할 때였다. 남도에 사는 친구가 불렀다. 동백이 한창이라고, 오늘 다녀왔는데 절정이라고, 안 오면 올해도 의미 없는 봄을 보내고 말 거라고. 그러니 다 버리고 내려오랬다.
그 말에 내 마음 어디에서 찡,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살면서 한 번이라도 그 무엇을 위해 ‘다 버린’ 적이 있었던가. 그 생각을 하니 눈시울이 조금 뜨거워졌다.
내가 가진 걸 다 버려도 좋을 만큼 동백이 애틋한 건 아니지만 나는 차를 몰아내려 갔다. 경주 진해 하동 광양, 거기서 돌산도로 향했다. 그러느라 닷새를 벚꽃과 동백에 바쳤다.
돌아오는 대로 여독을 물리치고 둥근마 절편과 감자씨와 씨토란을 들고 안성에 내려왔다. 나는 이랑을 타고 아내는 심었다. 밭 귀퉁이엔 제주산 방풍씨를 넣고, 머위 뿌리 한 움큼은 수돗가에 심고, 밭미나리 물주고. 그러고 아내는 서울로 가버렸다.
나는 혼자 남았다. 저들을 혼자 두고 나마저 떠날 수는 없다. 나는 몇 번이나 텃밭을 걸음 하며 흙 속에서 봄을 시작하는 그들의 출발을 지켰다. 왠지 지켜주어야겠다는 그런 설명할 수 없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들은 온전한 육신을 ‘버리고’ 절편이라는 낱조각으로 땅속 이랑에 뛰어들었다. 이제 그 몸으로 다시 깨어날 수 없다면 그들의 생은 그것으로 끝장날 만큼 절박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이 고요한 텃밭 안에서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다.
나는 식물들의 그런 사생결단의 삶을 고귀하게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지금 이 밤을 지켜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게 나라고 믿었다. 자식들이 냉혹한 세상을 홀로 흔들리며 다닐 때 그들이 중심을 잃지 않도록 집을 지켜주었던 사람은 모두 부모들이었다.
깊어가는 밤, 문을 열고 나가 그들이 안심하도록 헛기침을 한번 하고 방으로 들어온다.
키가 나를 능가했다. 넉넉하고 둥근 초록잎, 그리고 늦여름이면 피어주는 카라를 닮은 멋진 꽃.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릴 줄 아는 유연함과 폭양을 가려주는 그늘, 비 내리면 들려주던 토란잎 노래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다 좋았다.
토란을 심어놓고 나는 긴 여름 내내 비를 기다리며 살았다.
추석을 앞두고 드디어 토란을 캤다. 그때에야 알았다. 내가 가꾼 것이 알토란이라는 걸. 잘 익은 야자 덩이만한 알토란이 땅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오래 관계를 한 지인들에게 그걸 보냈다. 나도 모르는 토란 요리법을 읽은 대로 적어 함께 보낼 때의 그 기쁨이라니!
올해에 새로 발굴한 품종마다. 꼭 식탁 위에 올리자는 뜻으로 선택한 건 아니다. 낯선 작물과 만나고 그들의 심성을 살려 나가는 재미 때문이다. 늘 새로운 작물을 키워보지만 처음 재배할 때만큼 잘 된 적이 없다.
그만큼 몰입하기 때문이다. 마는 가을에 수확할 수 있는 성숙한 둥근 마의 절편을 심기로 했다. 석회 거름을 좋아하는 마를 위해 뜰 안의 메리골드 해바라기 백일홍 돼지감자 마른 꽃대를 태운 재거름을 준비했다.
이제 한 이틀 지나면 심으려 할 때였다. 남도에 사는 친구가 불렀다. 동백이 한창이라고, 오늘 다녀왔는데 절정이라고, 안 오면 올해도 의미 없는 봄을 보내고 말 거라고. 그러니 다 버리고 내려오랬다.
그 말에 내 마음 어디에서 찡,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살면서 한 번이라도 그 무엇을 위해 ‘다 버린’ 적이 있었던가. 그 생각을 하니 눈시울이 조금 뜨거워졌다.
내가 가진 걸 다 버려도 좋을 만큼 동백이 애틋한 건 아니지만 나는 차를 몰아내려 갔다. 경주 진해 하동 광양, 거기서 돌산도로 향했다. 그러느라 닷새를 벚꽃과 동백에 바쳤다.
돌아오는 대로 여독을 물리치고 둥근마 절편과 감자씨와 씨토란을 들고 안성에 내려왔다. 나는 이랑을 타고 아내는 심었다. 밭 귀퉁이엔 제주산 방풍씨를 넣고, 머위 뿌리 한 움큼은 수돗가에 심고, 밭미나리 물주고. 그러고 아내는 서울로 가버렸다.
나는 혼자 남았다. 저들을 혼자 두고 나마저 떠날 수는 없다. 나는 몇 번이나 텃밭을 걸음 하며 흙 속에서 봄을 시작하는 그들의 출발을 지켰다. 왠지 지켜주어야겠다는 그런 설명할 수 없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들은 온전한 육신을 ‘버리고’ 절편이라는 낱조각으로 땅속 이랑에 뛰어들었다. 이제 그 몸으로 다시 깨어날 수 없다면 그들의 생은 그것으로 끝장날 만큼 절박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이 고요한 텃밭 안에서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다.
나는 식물들의 그런 사생결단의 삶을 고귀하게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지금 이 밤을 지켜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게 나라고 믿었다. 자식들이 냉혹한 세상을 홀로 흔들리며 다닐 때 그들이 중심을 잃지 않도록 집을 지켜주었던 사람은 모두 부모들이었다.
깊어가는 밤, 문을 열고 나가 그들이 안심하도록 헛기침을 한번 하고 방으로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