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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도는 현금의 선순환

돌고 도는 현금의 선순환

by 이규섭 시인 2018.06.29

기억 저편의 기억을 떠올린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 인터뷰 기사다. 재벌 총수도 지갑을 가지고 다니는지, 지갑에 현금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하여 기자가 물었다.지갑을 열어 현금을 보여줬다. 큰 액수는 아닌 것으로 기억된다.

샐러리맨의 퇴근길 술값 정도다. 재벌 총수가 필요한 건 그때그때 수행 비서들이 알아서 챙겨줄 것이다.

현금을 손수 쓸 일은 없을 텐데 지갑을 넣고 다니는 게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꼈다. 지갑에 현금을 두둑하게 넣어 다니는 게 그 시절엔 부의 과시였다.

요즘은 카드 결제가 보편화되어 편리하다. 예전엔 금액이 적은 물품을 카드로 결제하려면 괜히 쭈뼛거렸으나 이제는 눈치 보지 않는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외출 때 현금을 챙기지 않아도 된다. 전철은 공짜 카드를 쓴다. 버스나 택시를 타도 카드로 처리한다.

현금을 주고 동전을 거슬러 받은 뒤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불편도 사라졌다. 현금이 없으니 지갑 도둑맞을 걱정이 줄었다. 오래전 출장지에서 현금과 신분증이 든 지갑을 통째로 날치기 당한 뒤 곤경에 빠졌던 트라우마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요즘은 훔쳐 간 카드를 쓰면 결제 내용이 문자 메시지로 곧바로 뜨니 범인을 잡을 수도 있다. 분실해도 재발급 받으면 된다.

카드 결제 환경도 진화를 거듭한다. 무인 매장이 늘어나는가 하면 ‘테이블 페이’까지 등장했다. 직장인들은 점심 먹고 더치페이로 각자 테이블에 앉아 카드로 계산한다. 휴대폰 간편 결제 이용률도 늘었다.

현금 없는 사회가 빠르게 정착하다 보니 화폐 발행이 해마다 줄었다고 한다. 발행된 화폐가 유통되지 않고 금고에서 잠자는 액수도 당연히 늘 수밖에 없다. 동전은 아이들 저금통 속에서 나들이할 때를 기다리며 깊은 잠에 빠졌다.

이제는 현금 자체를 번거롭게 여기는 ‘현금 귀차니즘’ 현상이 확산되어 생활의 변화를 실감한다. 고객이 계산대에 동전을 와르르 쏟아놓고 계산하라면 얼마나 황당하고 짜증 나겠는가. 200원짜리 사탕을 사면서 1만 원 지폐를 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르바이트생들은 동전으로 계산하는 손님을 ‘동전 빌런(Villain·악당)’이라고 부른다는 것. 미국 슈퍼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악당을 빗대 ‘일하기 귀찮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비꼬는 의미다. 현금 사용이 오히려 눈총받는 시대다.

일본은 아직 카드 사용이 보편화 되지 않았다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대부분 비싼 물품을 구입할 때나 쓴다고 한다. 택시도 카드를 받지 않는다. 편의점에서 카드 냈다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외출할 때 지갑에 얼마나 있으면 안심이 되느냐’는 아사히신문 설문조사에 5만엔(50만 7000원) 미만이 30%, 2만엔(20만 3000원) 미만이 39%라고 하니 여전히 현금 사용이 대세다.

개인적으론 카드 사용 빈도가 한국과 일본의 중간 정도 되는 것 같다. 퇴직 후 모임 때 더치페이가 정착되기까지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직 테이블 페이 수준은 아니고 N 분의 1로 나눠 현금으로 계산한다.

장례식이나 결혼식 부조금, 손자에게 주는 용돈은 여전히 현금이다. 현금을 손에 쥐고 물건을 흥정하던 시절, 인정은 훈훈했고, 돈은 돌고 돌아 선순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