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은 추우면 나무에 오르고, 오리는 추우면 물에 들어간다.
닭은 추우면 나무에 오르고, 오리는 추우면 물에 들어간다.
by 정운 스님 2019.05.21
어느 승려가 파릉(巴陵, 운문문언 제자)스님에게 물었다.“조사선祖師禪[불교의 수행 경지]과 여래선如來禪은 같은 겁니까? 다른 겁니까?”
파릉스님은 구체적인 답은 하지 않고, 엉뚱한 말씀을 하셨다.
“닭은 추우면 나무에 오르고, 오리는 추우면 물에 들어간다.”
추운 상황은 똑같지만, 추위를 피하는 수단[방법]에 있어서는 각기 다른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동물들도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만이 살 수 있는 특별한 방법들이 있다. 곧 거북이는 최대한 머리를 몸 안으로 움츠려 위기를 모면하고, 원숭이들은 나무 위로 올라가 최대한 적과 거리를 둔다.
목적은 같지만, 다른 길[방법ㆍ방향]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어느 누가 옳은 방법을 선택했는가? 어느 누구에게나 어떤 존재에게도 비난할 수 없다. 각 자신만의 길을 추구한 것이요, 자신만의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이든 친척ㆍ가족과의 관계에서든 가장 힘든 것은 인간관계이다. 관계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은 서로 생각[→문화]이 달라서이다.
생각이 다르니 행동하는 것도 다르고, 말하는 것도 각자의 자기 방식대로이다. 승려인 필자가 가끔 신도들과도 의견 충돌이 있을 때가 있다.
아니 대화가 단절된다고 보면 맞을 듯하다. 그 원인을 보면, 생각이 달라서인데 살아왔던, 살아가는 문화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계율이나 불문율 등 여러 방향에서 생활이 많이 다르니, 재가 신자들과 다른 문화를 형성해 살아간다.
또 어디서든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이 있다면, 종교 문제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일어난 큰 전쟁에도 종교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근자에도 테러나 분쟁이 종종 일어나고 있는데, 거기에도 내부를 보면, 종교가 자리 잡고 있다.
서로의 종교적인 편견 속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타인의 종교를 비방하고 그 종교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지탄하고, 살상을 서슴지 않는다. 실상이 이러한데, 이를 거스르는 뜻밖의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한국일보에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경상도 영천 은해사가 경북 경산의 작은 시골교회를 짓는데, 300만 원을 물질적으로 도와주었다.
이 교회는 유명건축가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하양의 ‘무학로 교회’를 무료로 설계해 주었다. 실은 신도가 30여명뿐인지라 교회가 너무 가난해 공사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겨우겨우 십시일반으로 교회를 완공했다고 한다.
그런데 경제적인 도움을 준 사람들 명단을 보았더니, 뜻밖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경상도의 사찰 중 하나인 은해사가 교회 공사비를 보시한 것이다.
기자가 사찰에 전화를 걸어 ‘어떤 연유로 공사비를 보탰느냐?’고 묻자, 주지스님은 “뭐 그런 걸 다 물어보느냐”며 “근처에 어려운 교회가 있어 돈을 조금 보탰습니다.
나도 하느님께 복 한번 받아보려고 했습니다.”고 쿨 하게 답하더란다. 군자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솔직히 가족끼리도 종교가 다르면 서로 다투기 마련이요, 한 민족끼리도 으르렁거리고 싸우기 일쑤이다.
그런데 이제는 성숙해져야 하리라. 종교라는 이질적인 문화를 수용하는 긍정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추구함에 상대가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파릉스님은 구체적인 답은 하지 않고, 엉뚱한 말씀을 하셨다.
“닭은 추우면 나무에 오르고, 오리는 추우면 물에 들어간다.”
추운 상황은 똑같지만, 추위를 피하는 수단[방법]에 있어서는 각기 다른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동물들도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만이 살 수 있는 특별한 방법들이 있다. 곧 거북이는 최대한 머리를 몸 안으로 움츠려 위기를 모면하고, 원숭이들은 나무 위로 올라가 최대한 적과 거리를 둔다.
목적은 같지만, 다른 길[방법ㆍ방향]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어느 누가 옳은 방법을 선택했는가? 어느 누구에게나 어떤 존재에게도 비난할 수 없다. 각 자신만의 길을 추구한 것이요, 자신만의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이든 친척ㆍ가족과의 관계에서든 가장 힘든 것은 인간관계이다. 관계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은 서로 생각[→문화]이 달라서이다.
생각이 다르니 행동하는 것도 다르고, 말하는 것도 각자의 자기 방식대로이다. 승려인 필자가 가끔 신도들과도 의견 충돌이 있을 때가 있다.
아니 대화가 단절된다고 보면 맞을 듯하다. 그 원인을 보면, 생각이 달라서인데 살아왔던, 살아가는 문화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계율이나 불문율 등 여러 방향에서 생활이 많이 다르니, 재가 신자들과 다른 문화를 형성해 살아간다.
또 어디서든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이 있다면, 종교 문제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일어난 큰 전쟁에도 종교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근자에도 테러나 분쟁이 종종 일어나고 있는데, 거기에도 내부를 보면, 종교가 자리 잡고 있다.
서로의 종교적인 편견 속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타인의 종교를 비방하고 그 종교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지탄하고, 살상을 서슴지 않는다. 실상이 이러한데, 이를 거스르는 뜻밖의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한국일보에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경상도 영천 은해사가 경북 경산의 작은 시골교회를 짓는데, 300만 원을 물질적으로 도와주었다.
이 교회는 유명건축가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하양의 ‘무학로 교회’를 무료로 설계해 주었다. 실은 신도가 30여명뿐인지라 교회가 너무 가난해 공사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겨우겨우 십시일반으로 교회를 완공했다고 한다.
그런데 경제적인 도움을 준 사람들 명단을 보았더니, 뜻밖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경상도의 사찰 중 하나인 은해사가 교회 공사비를 보시한 것이다.
기자가 사찰에 전화를 걸어 ‘어떤 연유로 공사비를 보탰느냐?’고 묻자, 주지스님은 “뭐 그런 걸 다 물어보느냐”며 “근처에 어려운 교회가 있어 돈을 조금 보탰습니다.
나도 하느님께 복 한번 받아보려고 했습니다.”고 쿨 하게 답하더란다. 군자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솔직히 가족끼리도 종교가 다르면 서로 다투기 마련이요, 한 민족끼리도 으르렁거리고 싸우기 일쑤이다.
그런데 이제는 성숙해져야 하리라. 종교라는 이질적인 문화를 수용하는 긍정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추구함에 상대가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