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일이든 이치든 절대적 선악이란 없다
세상 모든 일이든 이치든 절대적 선악이란 없다
by 정운 스님 2019.06.04
숲속 연못에 수많은 개구리들이 살고 있다. 개구리 가운데 대장이 말했다.“하늘은 우리 개구리를 위해 있고, 땅도 또한 우리에게 살 수 있는 공간을 주었다. 그리고 연못의 물, 허공의 공기도 모두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 허공에 떠도는 날파리나 땅에 기어 다니는 수많은 벌레들이 모두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
이런 말을 끝내자, 모인 개구리들이 하늘과 땅 등 자연에 감사하면서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런데 이때, 숲속에서 뱀 한 마리가 슬그머니 기어와 개구리 한 마리를 꿀꺽 삼켜버렸다.
개구리들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도망쳤다. 한참 만에 개구리들이 다시 모였고, 대장의 말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했는데, 우리를 해하는 적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한 개구리가 다시 대장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설마 뱀도 개구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럼 당연히 뱀도 개구리를 위해 존재한다. 뱀이 없어 개구리가 잡아먹히지 않는다면 개구리가 지나치게 번식해서 결국 우리가 살 공간이 없어지거든….”
세상 모든 일이든 이치든 절대적 선악이란 없다. 한편 절대적 관념도 없고, 절대적인 이념도 없는 법이다.
한 나라의 법칙도 그 나라 입장에서는 좋을지 모르나 외국인에게는 부당한 경우가 있다.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혁명이 성공하면 충신으로 남지만, 성공하지 못하면 역적으로 남는다. 그 예가 고려 말기 신돈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A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고, 가족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A가 타인을 해치거나 나쁜 행위를 통해 돈을 번다면 상대방에게는 필요한 존재가 못 된다.
곧 한편에서 선인善人이라고 추켜세운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악인이라고 그를 지탄한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도 자신과 뜻이 맞거나 잘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반대로 자신과 뜻이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악인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필자는 간혹 사람들이 특정 인물을 평가할 때, 절대적 선ㆍ악인이 없음을 염두에 둔다. 곧 그 사람의 말에 휘말려 들지 않으려 한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나 법칙, 사람들은 서로서로 대립되어 있다. 모든 것에 나와너, 옳고 그름, 번뇌와 보리, 선善ㆍ불선不善, 여자ㆍ남자, 명암明闇 등 존재들이 서로서로 이질적이다.
하지만 상대와 차이가 있으므로 존재가치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유마경>에서는 이 점을 불이不二 사상으로 논한다.
‘불이’란 상호 대립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인데, 단순히 ‘하나’라는 뜻만을 말하지 않는다.
불이의 참뜻은 대립과 차별을 넘어선 평등의 의미요, 궁극적 진리라는 뜻이다. 신라 원효스님이 말씀하신 화쟁和諍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선법善法도 없지만, 절대적인 악법도 없다. 또한 절대 선인도 없지만 절대 악인도 없다.
늘 사람을 평가할 때도 악보다는 선인으로서의 가능성에 마음을 두자. 대립이 있기 때문에 발전이 있고, 상대가 있기에 그 존재감이 빛난다.
어떤 것이든 대립의 반목이 아니라 평등과 평화를 마음에 새기자.
이런 말을 끝내자, 모인 개구리들이 하늘과 땅 등 자연에 감사하면서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런데 이때, 숲속에서 뱀 한 마리가 슬그머니 기어와 개구리 한 마리를 꿀꺽 삼켜버렸다.
개구리들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도망쳤다. 한참 만에 개구리들이 다시 모였고, 대장의 말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했는데, 우리를 해하는 적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한 개구리가 다시 대장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설마 뱀도 개구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럼 당연히 뱀도 개구리를 위해 존재한다. 뱀이 없어 개구리가 잡아먹히지 않는다면 개구리가 지나치게 번식해서 결국 우리가 살 공간이 없어지거든….”
세상 모든 일이든 이치든 절대적 선악이란 없다. 한편 절대적 관념도 없고, 절대적인 이념도 없는 법이다.
한 나라의 법칙도 그 나라 입장에서는 좋을지 모르나 외국인에게는 부당한 경우가 있다.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혁명이 성공하면 충신으로 남지만, 성공하지 못하면 역적으로 남는다. 그 예가 고려 말기 신돈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A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고, 가족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A가 타인을 해치거나 나쁜 행위를 통해 돈을 번다면 상대방에게는 필요한 존재가 못 된다.
곧 한편에서 선인善人이라고 추켜세운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악인이라고 그를 지탄한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도 자신과 뜻이 맞거나 잘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반대로 자신과 뜻이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악인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필자는 간혹 사람들이 특정 인물을 평가할 때, 절대적 선ㆍ악인이 없음을 염두에 둔다. 곧 그 사람의 말에 휘말려 들지 않으려 한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나 법칙, 사람들은 서로서로 대립되어 있다. 모든 것에 나와너, 옳고 그름, 번뇌와 보리, 선善ㆍ불선不善, 여자ㆍ남자, 명암明闇 등 존재들이 서로서로 이질적이다.
하지만 상대와 차이가 있으므로 존재가치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유마경>에서는 이 점을 불이不二 사상으로 논한다.
‘불이’란 상호 대립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인데, 단순히 ‘하나’라는 뜻만을 말하지 않는다.
불이의 참뜻은 대립과 차별을 넘어선 평등의 의미요, 궁극적 진리라는 뜻이다. 신라 원효스님이 말씀하신 화쟁和諍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선법善法도 없지만, 절대적인 악법도 없다. 또한 절대 선인도 없지만 절대 악인도 없다.
늘 사람을 평가할 때도 악보다는 선인으로서의 가능성에 마음을 두자. 대립이 있기 때문에 발전이 있고, 상대가 있기에 그 존재감이 빛난다.
어떤 것이든 대립의 반목이 아니라 평등과 평화를 마음에 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