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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대한민국 차례입니다

다음은 대한민국 차례입니다

by 한희철 목사 2019.07.03

이런 글을 쓰는 것은 필시 ‘비 오는 날 장독 덮은 자랑’과 다를 것이 없다는 걸 잘 압니다.그러면서도 그러거나 말 거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제 심사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쑥스럽지만 속내를 밝히자면 그만큼 마음속 설렘이 크기 때문입니다.

2년 전 6월 비무장지대(DMZ)를 따라 열하루 동안을 홀로 걸은 적이 있습니다. 관광이나 유람은 아니었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그 땅을 밟으며 허리가 잘린 이 땅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기도하며 걸어간 나의 걸음이 형편없이 갈라진 이 땅을 ‘호는’ 한 땀의 바느질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일부러 강원도 고성에 있는 명파초등학교를 찾아가 첫 걸음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명파초등학교는 우리나라 최북단에 있는 학교입니다.

비가 내리는 교정에 서서 어서 통일이 되어 남과 북의 어린이들이 한데 어울려 맘껏 뛰노는 그 날이 속히 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바치고는 고성-인제-원통-양구-방산-화천-철원-연천-파주, 마침내 임진각에 이르기까지 380㎞를 걸어가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폭우 속과 벌침처럼 쏟아지는 뙤약볕 아래를 한 마리 벌레처럼 걸었습니다.

그 길을 걸을 때만 해도 남북의 상황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대치상황이었습니다. 갈등과 불신이 극에 달해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를 짐작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지요.

DMZ를 따라 걸으며 만났던 끝을 알 수 없는 철조망과, 증오를 먹고 자라난 불신의 열매처럼 철조망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지뢰’ 경고판처럼 말이지요.

오랜 세월동안 쌓아온 증오와 불신의 시간에 비하면 그렇게 드린 기도는 너무도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정성이었습니다.

그런데요, 나름 깜짝 놀랄 일이 있었습니다. DMZ를 걸은 지 1년째 되던 날, 그 길을 걸을 때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있어났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만나 악수를 나눈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저는 속 떨리는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오랫동안 막혀 있었던 무엇인가가 마침내 흐르기 시작한다는 예감이 강하게 밀려왔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1년이 지났을 때 이번에는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보면서도 쉬 믿겨지지 않는 일입니다. 남북미 정상들이 판문점에서 만났으니,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습니다.

정말로 만화 같고 소설 같고 동화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언감생심 이런 일들이 내가 드린 기도 때문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힘을 보탠 것 같아 마음이 즐거울 따름입니다.

여러 해 전 베를린을 찾았을 때 일부러 찾아간 곳이 있었습니다. 동독과 서독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을 따로 세워둔 곳이었습니다.

장벽에는 수많은 낙서들이 적혀 있었는데, 눈에 띄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다음은 대한민국 차례입니다’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간절함이 하나씩 모아지게 될 때,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철조망도 마침내는 녹아지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