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신이 인간의 고통을 모두 해결해준다?

신이 인간의 고통을 모두 해결해준다?

by 정운 스님 2019.07.16

근자, 어느 일간 신문에 중진급 스님의 인터뷰가 있었다. 신문 제목에 ‘앞으로 미래에는 어떤 종교이든 사람들이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가 온다.’는 취지였다.앞으로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이 점점 줄어들 거라는 주장이다. 우리나라 경우, 1970년대의 경제 성장, 80년대와 90년대의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많았는데, 기도를 통해 성취하였다.

이렇게 현재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으니, 사람들의 원하는 바가 줄어들어 당연히 종교의 역할이 적어진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기도형 종교가 설 자리를 잃어간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물론 서양에서는 불교 명상을 하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가톨릭과 기독교 신자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한국도 어느 종교나 종교 신자가 줄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미래에 기도형 종교가 사라질 거라고는 보지 않는다. 결론을 말하면, 원하는 만큼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인간은 신을 의지하거나 부처에게 기도한다.

인간은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하나를 얻으려고 하고, 열 개를 얻어도 만족해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만족은 쉽지 않음이요, 죽을 때까지 채워지지 않는다.

아니 채워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욕구로 고통을 스스로 만든다고 보는 것이 적합한 답이다. 이에 인간에게 고통이 있는 한 신에게 의지하거나 부처를 찾게 되어 있다.

불교도 종교로서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 불교의 원 취지는 (부처를) 믿는 형태가 아니라 수양하는 종교이다.

둘째, 불교가 역사적으로 흘러오면서 부처님께 기도하는 형태로 발전되었다. 필자는 전자에 맞춰 글을 전개하려고 한다.

그러면 다른 차원에서 생각하기로 하자. 우리의 고통을 무조건 신[여기서는 모든 종교를 포괄]에게 해결해 달라고 할 것인가? 독자님들께서는 자신에게 고통이 일어났다면, 가만히 살펴보라.…

원인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보리달마가 520년 인도에서 중국으로 왔을 때, ‘혜가’라는 승려가 달마스님을 찾아와 말했다.

“스님, 저의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스승님께서 편안케 해 주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여기 손바닥 위에 그 불편한 마음을 올려 놓아보아라. 그러면 너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리라.”

“마음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해 마쳤느니라.”

곧 편안한 마음의 실체는 자신이 일으킨 고통 속에 있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세상은 모든 사람을 깨부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부서졌던 그 자리에서 한층 더 강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깨지지 않았던 사람들은 죽고 만다.” 바로 이 점이다. 인간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그 고통의 실마리는 자신에게 있음이요, 해결도 그 고통이 일어난 자리에 있다.

이를 인지하고, 기도하거나 명상한다면 인생에 조금은 활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힘든 세상, 독자님들이 조금만이라도 덜 고통 받고, 행복하기를 발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