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힘
벌거벗은 힘
by 운영자 2011.11.11
‘젊거나 늙거나/ 저기 저 참나무같이/ 네 삶을 살아라./봄에는 싱싱한/ 황금빛으로 빛나며//
여름에는 무성하지만/ 그리고, 그러고 나서/ 가을이 오면 더욱 더 은은한/황금빛이 되고// 마침내 나뭇잎/ 모두 떨어지면/ 보라, 줄기와 가지로/ 나목이 되어 선/ 벌거벗은 저 힘을’
영국의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참나무’를 처음 대한 것은 병영생활 중고참이 되었을 무렵이다.
문학청년 고참병이 제대를 앞두고 건네준 손때 묻은 시집에 담겨 있었다. ‘젊거나 늙거나 참나무같이 네 삶을 살아라’는 시구가 삶의 경구처럼 가슴에 와 닿았다.
영국의 참나무(The Oak) 는 고목이 울창하여 숲의 군주 대접을 받는다. 한국의 산야에는 흔한 게 참나무로 우리 생활과 밀접한 나무다.
굴참나무 껍질은 ‘굴피집’의 재료로 여름엔 바람이 잘 통해 서늘하고, 겨울엔 눈이 쌓여 포근하다.
신갈나무는 옛날 나무꾼들이 짚신 바닥이 헤지면 신갈나무 잎을 깔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떡갈나무는 뒷면에 갈색털이 있는 잎에 떡을 싸서 쪄먹었던 데서 유래됐다. 재질이 단단한 참나무로 구운 참숯은 화력이 세고 오래간다.
참나무처럼 단단하고 성품이 곧고 부지런했던 그 고참 병장은 문학의 꿈은 이루지 못했으나 제대 후 취업하여 결혼을 했다며 신접살림집에 초대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뒤 그의 부인으로부터 남편이 타계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싱그러운 봄 같은 삶도 채 누리지 못한 채 허망하게 떠났다.
망각의 세월 속에 까맣게 잊고 살다가 ‘참나무’시를 다시 읽으니 불현듯 떠오른다.
제대한지 40여 년이 흘렀다. 그 시절의 앨범을 들춰보니 앳된 얼굴의 육군병장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며 “아! 나도 늙었구나” 탄식이 절로 나온다.
황금빛처럼 빛나는 젊은 시절을 보낸 건 아닐지라도 언론외길을 걸으며 치열하게 살았다. 여름의 무성한 잎처럼 풍요로운 삶은 아니더라도 구차하게 살지는 않았다.
예전 같으면 ‘지공대사(지하철 공짜로 타는 세대)’반열에 오르면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았지만 아직은 ‘인생의 겨울’은 아니라고 자위해 본다.
그렇다고 노욕이나 노추를 부릴 만큼 세상은 녹록치 않다. ‘벌거벗은 참나무’같은 나력(裸力)으로 여생을 담채색으로 채색하며 중중모리 가락으로 살고 싶을 뿐이다.
입동이 지났으니 겨울의 길목이다. 황금빛 들녘은 을씨년스럽게 비어가고, 스산한 바람결에 나무들이 옷을 벗는다.
법정 스님은 ‘저 수목들의 빈 가지처럼 허공에 귀를 열어 소리 없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겨울의 빈 들녘처럼 우리들의 의식을 비울 필요가 있다’고 했다.
노자는 ‘그릇이 가득 차면 반드시 넘친다(영필일야 ․ 盈必溢也)’고 했듯이 인생의 연륜이 쌓일수록 비움의 미학이 필요하다.
마음을 비우면 채울 수 있는 여백이 생기기 마련이고, 여백은 곧 새로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벌거벗은 힘’이 되어 삶의 활력소가 된다.
젊으나 늙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화폭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지혜를 황금빛 참나무에게 배웠으면 한다.
시인ㆍ칼럼니스트 이규섭
여름에는 무성하지만/ 그리고, 그러고 나서/ 가을이 오면 더욱 더 은은한/황금빛이 되고// 마침내 나뭇잎/ 모두 떨어지면/ 보라, 줄기와 가지로/ 나목이 되어 선/ 벌거벗은 저 힘을’
영국의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참나무’를 처음 대한 것은 병영생활 중고참이 되었을 무렵이다.
문학청년 고참병이 제대를 앞두고 건네준 손때 묻은 시집에 담겨 있었다. ‘젊거나 늙거나 참나무같이 네 삶을 살아라’는 시구가 삶의 경구처럼 가슴에 와 닿았다.
영국의 참나무(The Oak) 는 고목이 울창하여 숲의 군주 대접을 받는다. 한국의 산야에는 흔한 게 참나무로 우리 생활과 밀접한 나무다.
굴참나무 껍질은 ‘굴피집’의 재료로 여름엔 바람이 잘 통해 서늘하고, 겨울엔 눈이 쌓여 포근하다.
신갈나무는 옛날 나무꾼들이 짚신 바닥이 헤지면 신갈나무 잎을 깔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떡갈나무는 뒷면에 갈색털이 있는 잎에 떡을 싸서 쪄먹었던 데서 유래됐다. 재질이 단단한 참나무로 구운 참숯은 화력이 세고 오래간다.
참나무처럼 단단하고 성품이 곧고 부지런했던 그 고참 병장은 문학의 꿈은 이루지 못했으나 제대 후 취업하여 결혼을 했다며 신접살림집에 초대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뒤 그의 부인으로부터 남편이 타계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싱그러운 봄 같은 삶도 채 누리지 못한 채 허망하게 떠났다.
망각의 세월 속에 까맣게 잊고 살다가 ‘참나무’시를 다시 읽으니 불현듯 떠오른다.
제대한지 40여 년이 흘렀다. 그 시절의 앨범을 들춰보니 앳된 얼굴의 육군병장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며 “아! 나도 늙었구나” 탄식이 절로 나온다.
황금빛처럼 빛나는 젊은 시절을 보낸 건 아닐지라도 언론외길을 걸으며 치열하게 살았다. 여름의 무성한 잎처럼 풍요로운 삶은 아니더라도 구차하게 살지는 않았다.
예전 같으면 ‘지공대사(지하철 공짜로 타는 세대)’반열에 오르면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았지만 아직은 ‘인생의 겨울’은 아니라고 자위해 본다.
그렇다고 노욕이나 노추를 부릴 만큼 세상은 녹록치 않다. ‘벌거벗은 참나무’같은 나력(裸力)으로 여생을 담채색으로 채색하며 중중모리 가락으로 살고 싶을 뿐이다.
입동이 지났으니 겨울의 길목이다. 황금빛 들녘은 을씨년스럽게 비어가고, 스산한 바람결에 나무들이 옷을 벗는다.
법정 스님은 ‘저 수목들의 빈 가지처럼 허공에 귀를 열어 소리 없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겨울의 빈 들녘처럼 우리들의 의식을 비울 필요가 있다’고 했다.
노자는 ‘그릇이 가득 차면 반드시 넘친다(영필일야 ․ 盈必溢也)’고 했듯이 인생의 연륜이 쌓일수록 비움의 미학이 필요하다.
마음을 비우면 채울 수 있는 여백이 생기기 마련이고, 여백은 곧 새로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벌거벗은 힘’이 되어 삶의 활력소가 된다.
젊으나 늙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화폭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지혜를 황금빛 참나무에게 배웠으면 한다.
시인ㆍ칼럼니스트 이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