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한스의 비극
불행한 한스의 비극
by 운영자 2011.11.28
독일의 그림 형제가 수집한 <그림 동화집> 에 ‘행복한 한스’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스는 칠 년을 꼬박 일하고서 품삯을 받은 금덩이를 말, 늙은 소, 돼지로 바꾸다가 결국 돌덩이로 바꾸었지만 아예 그것마저 잃어버립니다.
답답하고 속 터지는 동화이지요. 그런데도 동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스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이라고 외칩니다.
이를 보고 진정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혹여 “바보 같은 놈” 이라고 조롱하지 않을까요? 눈앞의 고통을 피하려고 소중한 것을 버리고 말았다고 어리석음을 개탄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요?
필자 역시 이 동화를 읽으면서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자꾸만 바꾸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마는 한스가 답답하기 그지없었지요. 그러니 “행복한 한스” 가 아니라 “어리석은 한스” 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한스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지를 간파한다면, 그가 얼마나 현명한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가 원한 것은 금덩이가 아니라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지요.
만일 그가 금덩이를 말과 바꾸지 않았고 그래서 또 다시 무엇인가 바꾸지 않았다면 결국 그는 금덩이의 무게에 짓눌려 그리운 집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그는 소중한 것들을 미련 없이 버렸고 오히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감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의 모습을 짚어 봅시다. 만일 한스가 내 자식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어리석은 놈이라고 혼쭐을 내고 두들겨 패기도 할 것입니다.
며칠 전 고등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끔찍한 범죄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이 학생은 우등생이었지만 어머니는 만족하지 못하고 전국 일등을 강요하며 성적이 맘에 안 들면, 굶기거나 잠을 재우지 않았고 심지어는 야구방망이와 골프채로 때리기도 했답니다.
결국 어머니의 지나친 욕심이 비극을 자초한 셈이지요. 오늘날 부모들은 자식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행복한 한스” 와는 반대로 더 많이 더 높이 올라가지를 기대합니다. 끊임없이 더 값진 것으로 바꾸어 일등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행복을 위해 가진 것마저 버리는 한스 식의 삶은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일로 치부합니다.
행복보다는 더 많이 갖기를 강요하며 아이들을 “불행한 한스” 로 내몰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스로 부터 얻게 되는 지혜는 버림의 미학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마르쿠제는 한스를 ‘최초의 행복 철학자’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을 보장해 줄 것으로 착각하지만 그것은 행복을 보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행복을 방해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유물은 마네킹의 옷에 불과하다고 경고합니다. 마네킹에 걸쳐진 옷을 화려하지만 그것은 마네킹의 옷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옷이 될 것처럼 착각하여 그 빛나는 옷을 탐하며, “불행한 한스” 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야말로 비극이 아닐까요? 비극을 피하려면 아이들에게 “행복한 한스” 를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이성록 박사
답답하고 속 터지는 동화이지요. 그런데도 동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스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이라고 외칩니다.
이를 보고 진정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혹여 “바보 같은 놈” 이라고 조롱하지 않을까요? 눈앞의 고통을 피하려고 소중한 것을 버리고 말았다고 어리석음을 개탄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요?
필자 역시 이 동화를 읽으면서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자꾸만 바꾸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마는 한스가 답답하기 그지없었지요. 그러니 “행복한 한스” 가 아니라 “어리석은 한스” 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한스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지를 간파한다면, 그가 얼마나 현명한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가 원한 것은 금덩이가 아니라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지요.
만일 그가 금덩이를 말과 바꾸지 않았고 그래서 또 다시 무엇인가 바꾸지 않았다면 결국 그는 금덩이의 무게에 짓눌려 그리운 집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그는 소중한 것들을 미련 없이 버렸고 오히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감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의 모습을 짚어 봅시다. 만일 한스가 내 자식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어리석은 놈이라고 혼쭐을 내고 두들겨 패기도 할 것입니다.
며칠 전 고등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끔찍한 범죄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이 학생은 우등생이었지만 어머니는 만족하지 못하고 전국 일등을 강요하며 성적이 맘에 안 들면, 굶기거나 잠을 재우지 않았고 심지어는 야구방망이와 골프채로 때리기도 했답니다.
결국 어머니의 지나친 욕심이 비극을 자초한 셈이지요. 오늘날 부모들은 자식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행복한 한스” 와는 반대로 더 많이 더 높이 올라가지를 기대합니다. 끊임없이 더 값진 것으로 바꾸어 일등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행복을 위해 가진 것마저 버리는 한스 식의 삶은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일로 치부합니다.
행복보다는 더 많이 갖기를 강요하며 아이들을 “불행한 한스” 로 내몰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스로 부터 얻게 되는 지혜는 버림의 미학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마르쿠제는 한스를 ‘최초의 행복 철학자’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을 보장해 줄 것으로 착각하지만 그것은 행복을 보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행복을 방해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유물은 마네킹의 옷에 불과하다고 경고합니다. 마네킹에 걸쳐진 옷을 화려하지만 그것은 마네킹의 옷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옷이 될 것처럼 착각하여 그 빛나는 옷을 탐하며, “불행한 한스” 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야말로 비극이 아닐까요? 비극을 피하려면 아이들에게 “행복한 한스” 를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이성록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