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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시골마을 풍경

그리운 시골마을 풍경

by 운영자 2012.02.15

황산개울 다리 건너 충청도 초입
이른바 충청북도 소태면 덕은리
정월 대보름을 맞아 윷판이 벌어졌다
노장 대 소장
그 나이가 그 나이 같은데 편은 두 편이다
썩썩 낫으로 깎아 만든 못생긴 윷을
길바닥 아무데나 던지면 된다
말은 소주병 병뚜껑에 담배꽁초 네 개씩
앞서거니 뒤서거니 흥이 오른다
윷 한 번 치고는 덩실덩실 춤이 한참이고
저만치 앞선 말 용케 잡고는
얼싸 좋네 얼싸안고 블루스가 그럴듯하다
기분 좋아 한 잔 아쉬워서 한 잔
질펀하게 어울릴 때

술 너무 허지 말어
술 먹다가 세월 다 가
지나가던 한 사람 불쑥 끼어들자
그게 웬 소리 철모르는 소리
이게 세월이지
암, 이게 세월이야
윷판은 끝날 줄을 모르고
또 하나의 세월은 그렇게 가고
-졸시 <세월>

빛이 바랜 흑백사진처럼 남아 있는 풍경이 있습니다. 해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동네 이곳저곳에서 신나는 윷판이 벌어지고는 했지요.

다리 하나 사이로 강원도와 충청북도가 갈리는 덕은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키가 낮은 지붕의 작은 가게와 냉장 돼지고기가 맛있었던 푸주간이 마주선 마당에 윷판이 벌어지고는 했습니다.

썩썩 낫으로 깎아 만든 커다란 윷은 보기만 해도 재밌고 시원했습니다. 윷이 긁힐까 염려할 것도 없어 따로 가마니를 깔 것도 없이 바닥 아무렇게나 던져도 되는 윷이었습니다.

이기면 좋아서 한 잔 지면 아쉬워서 한 잔 술내기가 고작이었지만, 동네가 들썩일 만큼 흉볼 것도 없는 흥이 가득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다 보름달이 떠오를라치면 동네 아이들의 쥐불놀이가 시작되어 하늘의 보름달을 닮은 붉은 원들이 춤을 췄고, 동네 어머니들은 동산에 올라 한 해 소원을 빌고는 했습니다.

낡은 액자 속에 담긴 흑백사진처럼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그토록 그리운 그 아름다운 풍경이.

한희철 목사는 강원도 단강교회와 독일 프랑크푸르트교회에 이어 지금은 부천의 성지감리교회의 담임목사로 목회하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삶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글로 남겨 《내가 선 이곳은》 《하나님은 머슴도 안 살아봤나》 《흙과 농부와 목자가 만나면》 등의 책을 냈다.
한희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