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살아있는 여신

살아있는 여신

by 운영자 2012.03.09

설산을 품고 있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는 히말라야의 관문이자 유서 깊은 ‘사원의 도시’이다. 중세의 건축물이 즐비한 ‘더르바르 광장’은 옛 왕궁을 중심으로 독특한 양식의 사원들이모여 있고 신상(神像)마다 설화가 스며있다.

카트만두 원주민 네와르족의 문화가 꽃피운 건축물과 장식예술은 미술사에서 수준 높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더르바르는 ‘왕궁’이라는 의미로 19세기까지 네팔 왕족이 머물렀으나 건물 일부는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옛 왕궁 하누만 도카 입구에는 네팔인들이 가장 숭배하는 원숭이 신 ‘하누만’이 수문장 노릇을 한다. 맞은 켠 딸레주사원은 40m 높이에 3층 12기단으로 도도한 기품이 느껴진다.

쉬바신을 모시는 데발사원의 계단은 네팔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이자 관광객들에게는 광장을 조망하는 명소다. 더르바르 광장 남쪽 끝에 위치한 쿠마리사원은 살아 있는 살아있는 쿠마리 여신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여행자들의 발길로 붐빈다.

쿠마리사원은 ‘ㅁ’자 형 3층 건물로 경내에는 작은 불탑과 석조 향로가 있을 뿐 단조롭다. 쿠마리 여신은 고대 힌두여신인 ‘탈레주’의 화신으로 여기며 힌두교도는 물론 불교신자들도 숭배한다. 절대 권력자인 왕도 무릎을 꿇고 경배할 정도로 신으로서의 권능을 인정받는다.

쿠마리 여신 선발과정은 전대(前代) 달라이 라마가 환생(還生)한 것으로 보이는 어린이를 판첸라마(후계자)로 지정하는 상징적 혈연 세습구조와 비슷하다.

승려, 왕실의 점성가, 브라만 등으로 구성된 선발위원회가 5~6세의 여자어린이 가운데 만장일치제로 선발한다. 쿠마리가 되려면 건강하고 흉터 없는 몸에 까만 눈동자와 검은 머리카락, 가지런한 치아에 침착하고 겁이 없어야 하는 등 32가지의 신체적, 정신적 조건을 고루 갖춰야 할 정도로 까다롭다고 한다.

쿠마리로 선발된 뒤에는 쿠마리사원에서 제한된 가족과 함께 사실상 영어(囹圄)의 생활을 한다. ‘인드라 자트라 축제’를 비롯해 1년에 몇 차례 밖에 사원 밖을 나올 수 없다.

정해진 시간에 신도와 관광객들을 위해 3층 발코니에서 창문을 열고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는 데 아쉽게 보지는 못했다. 현재의 쿠마리는 아홉 살로 붉은 빛 화려한 의상에 황금빛 왕관을 쓰고 짙은 화장을 한 관광엽서 사진으로 만났다.

숭배 받는 쿠마리 여신은 초경을 시작하면 사원에서 축출 당한다. 피를 부정하게 여기는 인습 때문이다. 은퇴한 쿠마리가 결혼을 하면 남편이 죽는다는 속설로 결혼도 못하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힘들게 생활하거나 자취를 감춘다고 하니 쿠마리 여신의 말로는 비참하다. 그동안 쿠마리제도는 아동인권을 침해하고 학습권을 빼앗는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2008년 네팔 대법원은 ‘쿠마리의 학습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사원측은 법원의 판결에 반발하며 여전히 쿠마리의 대중 접촉을 제한하고 있다.

2010년 9년째 쿠마리로 살아온 15살의 소녀가 중등교육과정 졸업자격시험에 합격해 화제가 됐다. 은퇴 후 자취를 감춘 역대 쿠마리들과 달리 사회진출의 기회가 마련 된 것은 처음이다.

네팔의 오랜 종교 관습과 살아있는 여신의 비참한 생활이 열린 세상 앞에 서서히 변화하는 것은 여성의 행복권과 아동 인권차원에서도 다행이다.

이규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