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감자꽃을 보며

감자꽃을 보며

by 운영자 2012.05.30

학생들을 데리고 농촌봉사활동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밭 사이를 지나가다 보니 한창 꽃을 피워낸 감자 밭이 보였습니다. 따로 볼 땐 몰랐는데 한군데 피어있으니 그 또한 장관이더군요.

혹시나 싶어 학생들에게 이 꽃이 무슨 꽃인 줄 아느냐 물었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아는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어이없어 하며 이게 바로 감자꽃이라고 하자 한 학생이 뜻밖이라는 듯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니, 감자도 꽃이 펴요?”

그런 학생들에게 권태응 선생님이 쓴 동시 ‘감자꽃’을 노래로 만든 동요를 들려주었습니다.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그제야 학생들 중 몇이 “아하, 그 노래” 하며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했습니다.

감자꽃이 눈앞에 지천으로 피었어도 그게 감자꽃인 줄 모르는 학생들 세대, 그게 어디 단어 하나를 모르는 것일까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컸습니다.

감자꽃을 모르는 학생들에게 <감자꽃>이란 동시집을 낸 권태응 선생님을 기억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터, 그 또한 안타까웠습니다.

권태응 선생님은 충주에서 태어나 충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인 19○○○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독서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며 얻은 폐결핵으로 1951년 3월, 그러니까 6.25전란을 겪은 이듬해 세상을 떴으니 내내 어둡고 우울한 시대를 사신 분이었지요.

선생님은 겨우 33년 2개월을 살았는데, 세상을 뜨기 전 6년 동안 병상에서 병마와 싸우며 동시를 쓰셨습니다. 동시집 <감자꽃>만큼 우리 농촌 풍경과 그 속에 스민 삶을 담아낸 글도 드물다 싶습니다.

선생님의 글 속에 농촌의 풍경과 삶이 사진보다도 더 세밀하고 풍성하게 담겨 있다고 느끼는 것은, 사진으로는 담아내기 힘든 숨결까지가 글 속에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을 지붕위에 올라 앉아 달구경을 하는 박, 울타리를 타고 매달린 호박, 아기들이 따먹는 빨간 앵두, 실에 꿰어 염주를 만들기도 했던 율무, 눈을 꼭 감고 무섬도 없이 떨어지는 도토리, 젖 한 통 먹고는 콜콜 잠에 빠진 송아지, 잡아뒀다 가물 때 울게 하고 싶은 청개구리, 봄에는 노랑꽃 가을에는 하양꽃 일 년에 두 번 꽃을 피우는 목화, 네 번 잠을 자는 누에, 논에다가 심는 논보리, 이틀 만에 한 번씩 들어오는 전깃불, 먼산 나무 소바리에 싣고 오려고 먹는 새벽밥, 한동네서 잔치를 지내 얻은 이름 한말댁, 수숫대 안경 쓰고 소리쳐 뛰다니던 수숫대 기차놀이 등 <감자꽃> 속에는 농촌의 삶과 풍경이 빼곡하게 담겨 있습니다.

요즘 학생들 세대가 쓰는 말들을 보면 정말 무슨 말인지 짐작을 할 수가 없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 중에는 욕이 많습니다. 낯부끄럽고 거친 욕설이 일상어가 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가벼운 언어유희라 하기엔 치유가 불가능하다 싶을 만큼의 중병이다 싶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던 한 철학자의 말을 떠올리지 않는다 해도, 말이 병들었다는 것은 생각이 병들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 그런 점에서도 <감자꽃>을 통해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운 쓰임새를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큽니다.

게임기와 핸드폰에 정신이 팔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밭으로 나가 거기 활짝 핀 감자꽃을 보며 모처럼 이야기꽃을 활짝 피우는 것도 좋은 여름맞이 아닐까요.

한희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