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 이태리포플러와 노박덩굴의 만남
동거: 이태리포플러와 노박덩굴의 만남
by 운영자 2012.06.14
더불어 삶은 인류의 길이다. 인류가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은 그것만이 인류가 유일하게 살아남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제 더불어 삶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휴일에 간혹 산에 가면 나무와 나무가 동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무들의 이러한 모습에 익숙하지 못해 한 존재를 무시한다. 특히 큰키나무와 덩굴성 나무가 동거할 경우 어김없이 덩굴성을 구박한다.
지난 주 인근 산에 갔다가 이태리포플러와 노박덩굴이 동거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 동안 소나무와 담쟁이덩굴, 참나무 종류와 담쟁이덩굴, 소나무와 다래나무, 뽕나무와 능소화 등이 동거하는 모습은 자주 보았지만 이태리포플러와 노박덩굴이 동거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내가 두 나무가 동거하는 모습을 잘 보지 못한 것은 아직 나무를 많이 보지 못했다는 반증이지만, 이태리포플러와 노박덩굴의 만남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연못 인근 개울가의 버드나뭇과 이태리포플러는 교정의 이태리포플러처럼 아주 웅장하다. 이 나무의 이름에 나라 이름이 붙은 것은 원산지는 중국이지만 일본의 가이즈까(패총)에서 수입해서 붙여진 가이즈까향나무처럼 캐나다가 원산이지만 이탈리아에서 도입했기 때문이다.
노박덩굴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철나무, 화살나무의 부모이다. 노박덩굴이 몸집이 아주 큰 이태리포플러에 찰싹 달라붙어서 하늘로 향하는 모습이 앙증맞다.
노박덩굴의 이러한 몸짓이 포플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러한 모습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산에서 생장하는 나무들의 동거는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인간도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이 산에 가는 것은 단순히 건강에 좋은 피톤치드 때문이 아니라 식물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산에 가면 마음이 바뀐다.
현대인들은 도심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는 어깨를 스쳐도 인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깨를 부딪치면 화를 내거나 심할 경우 폭력도 행사한다.
그러나 산에서는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숲의 기운이 사람의 착한 심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노박덩굴이 이태리포플러에 기대서 사는 것은 두 존재의 운명적인 만남이다.
운명적인 만남은 어느 한 쪽의 이해득실을 절대 따지지 않는다. 그래야만 서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둘의 운명적인 만남에 간여하면 예의가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모습이다. 산에서 나무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스스로 그러한 삶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그러한 삶은 결코 혼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생명체든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에 집착하면 이태리포플러만 보이고 노박덩굴은 보이지 않는다.
덩굴성나무는 눈에 확 띄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지만, 그런 모습도 눈에 잘 띄는 존재만큼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생명의 가치는 크고 작음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은 것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강판권 <교수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무들의 이러한 모습에 익숙하지 못해 한 존재를 무시한다. 특히 큰키나무와 덩굴성 나무가 동거할 경우 어김없이 덩굴성을 구박한다.
지난 주 인근 산에 갔다가 이태리포플러와 노박덩굴이 동거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 동안 소나무와 담쟁이덩굴, 참나무 종류와 담쟁이덩굴, 소나무와 다래나무, 뽕나무와 능소화 등이 동거하는 모습은 자주 보았지만 이태리포플러와 노박덩굴이 동거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내가 두 나무가 동거하는 모습을 잘 보지 못한 것은 아직 나무를 많이 보지 못했다는 반증이지만, 이태리포플러와 노박덩굴의 만남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연못 인근 개울가의 버드나뭇과 이태리포플러는 교정의 이태리포플러처럼 아주 웅장하다. 이 나무의 이름에 나라 이름이 붙은 것은 원산지는 중국이지만 일본의 가이즈까(패총)에서 수입해서 붙여진 가이즈까향나무처럼 캐나다가 원산이지만 이탈리아에서 도입했기 때문이다.
노박덩굴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철나무, 화살나무의 부모이다. 노박덩굴이 몸집이 아주 큰 이태리포플러에 찰싹 달라붙어서 하늘로 향하는 모습이 앙증맞다.
노박덩굴의 이러한 몸짓이 포플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러한 모습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산에서 생장하는 나무들의 동거는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인간도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이 산에 가는 것은 단순히 건강에 좋은 피톤치드 때문이 아니라 식물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산에 가면 마음이 바뀐다.
현대인들은 도심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는 어깨를 스쳐도 인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깨를 부딪치면 화를 내거나 심할 경우 폭력도 행사한다.
그러나 산에서는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숲의 기운이 사람의 착한 심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노박덩굴이 이태리포플러에 기대서 사는 것은 두 존재의 운명적인 만남이다.
운명적인 만남은 어느 한 쪽의 이해득실을 절대 따지지 않는다. 그래야만 서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둘의 운명적인 만남에 간여하면 예의가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모습이다. 산에서 나무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스스로 그러한 삶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그러한 삶은 결코 혼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생명체든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에 집착하면 이태리포플러만 보이고 노박덩굴은 보이지 않는다.
덩굴성나무는 눈에 확 띄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지만, 그런 모습도 눈에 잘 띄는 존재만큼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생명의 가치는 크고 작음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은 것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강판권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