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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스런 사랑 풍경

사치스런 사랑 풍경

by 운영자 2012.06.21

전철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맞은 편에 앉은 남녀의 사랑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가 몸을 틀어 옆에 앉은 남자의 가슴에 안겨 잠을 자고 있다. 좁은 자리다 보니 안긴 여자나 안고 있는 남자나 그 자세가 매우 어색했다.

여자를 어색하게 안은 남자는 부동의 자세다. 머리카락이 노랗다. 초록색 티셔츠에 반바지다. 그 품에 안겨 잠을 자는 여자는 얼굴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옷차림이 교복이다. 흰 하복 블라우스에 회색치마다.

그러고 보면 사복을 입은 초록티셔츠는 남자 고등학생 같다. 어색하게 안고 안겨 있는 그들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또 이제 막 사랑을 알아가는 어린 청춘들 같아 재미있기도 했다.

얼마 뒤 내 눈길이 다시 그들에게로 갔다. 초록티셔츠의 품에 안겼던 흰 블라우스가 깨어났다. 흰 블라우스는 안긴 채로 초록티셔츠의 턱을 어루만진다. 그러더니 코를 만지고, 귀를 꼬집더니 깔깔깔 웃는다.

그걸 내려다보는 초록티셔츠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연실 흰 블라우스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주거나 귀밑머리를 들어올려 귓등으로 넘겨준다.

초록티셔츠는 흰 블라우스가 행여 불편해할까봐 그러는지 여전히 부동의 자세로 앉은 채 손만 움직인다. 이번엔 흰 블라우스의 팔을 쓰다듬는다. 블라우스는 그런 초록티셔츠가 마음에 드는지 그의 입술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초록티셔츠가 그 손가락을 문다.

“이 후레자슥 놈들!”경로석에서 천둥같은 소리가 날아왔다. 전철에 탄 사람들은 놀랐다. 말은 안 하지만 두 남녀의 맞은편에 앉은 우리들, 나처럼 눈을 똑똑히 뜨고 보지 않은 사람들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물론 이 광경과 무관히 가는 이들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달랐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안겨 있던 그대로, 손가락을 입에 문 그대로, 그들의 사랑을 진행해 가고 있었다. 흰 블라우스는 아까보다 더 바짝, 초록티셔츠의 목에 한 팔을 감아안고 있었다. 그들의 포즈는 당당했다.

거의 영화에서 보는 연기의 수준이었다. 자신들 앞에 앉은 우리를 마치 관객 취급하는 듯 했다. 이 모습 어때? 멋있지 않어? 부럽지는 않고? 아님 좀 비싸 보이지 않어? 뭐 그런 투로 더 적극적으로 껴안았다.

“저러니까 선생 말인들 듣겠어.” 좀전의 노인이 혀를 찼다. 그래도 목소리가 아까보다 한결 가라앉았다. 나도 그렇고, 거기 앉아있던 어른들, 서 있던 몇 몇 어른들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구도 노인의 말에 호응하거나 가세하지 않았다. 한참만에 두 학생이 일어났다. 전철이 서면 얼른 내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출입문에 기대더니 초록티셔츠가 흰 블라우스의 이마위에 턱을 얹은 채 마주 껴안았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사람 같았다. 어쩌면 이 칸에 탄 어른들에게 어떤 시위를 하는 것도 같았다. 고속버스터미널역에서 그들이 내렸다. 전철 안이 갑자기 싱거워졌다.

내가 다니는 직장에 갓입사한, 충주가 고향인 미혼의 여자사서가 있다. 전철에서 보는 요즘 남녀들의 사랑 풍경을 이야기했더니 그도 놀랐다면서 치를 떨었다.

“서울 애들 너무 지나치다고 다들 그래요.” 그러면서 “사치를 부리는 것 같아요, 사랑 사치!” 했다. 어찌 보면 그들도 고급차를 몰고 그 사치를 과시하는 어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기에 자신들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는 눈들이 부끄럽지가 않다. 오히려 자랑스럽다.

사치행각이라 여기니까. 우리 사회의 과시욕에 가득찬 병적 증후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사랑을 능가하는 획기적 사치품이 나오면 이런 사랑풍경도 사라지리라, 하며 웃어본다.

권영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