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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놈

꽃 같은 놈

by 운영자 2012.06.25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결국 인간관계이다. 오늘 아침엔 복잡한 인간관계를 생각하며 정호승 시인의 “벗에게 부탁함”이란 시를 떠 올려 본다.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 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저 꽃 같은 놈/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는 시인의 염원은 언제나 염원에 머물러 있다. 그러기에 시인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서 대화를 청하고 있다. 대화적 존재로서 참다움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생의 모든 과정에서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간(人間)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리킨다. 즉 인간은 “사이(間)”의 존재이며 끊임없이 타자와 상호작용하는 관계적 존재인 것이다. 문제는 관계의 양식이다.

사람들은 인간 사이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사랑의 공동체를 요청한다. 마틴 부버에 의하면 참된 공동체는 “나와 너”의 관계가 지배적인 곳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나”와 만나는 타자는 대부분 “그것”으로 존재한다. 과연 우리에게 있어서 상생의 관계로서 “너”는 실제로 가능한 것인가?

인간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카인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자기중심적 존재이기에 나를 만나는 타자는 “그것”이 될 수밖에 없다. 하여, 타자를 독자적인 주체로서 대하지 않고 객체화하고 수단화 한다. 서로 상대를 깔보고 억누르고 짓밟고 괴롭히면서 우월감을 드러내고 자신의 뜻에 복종하기를 바란다. 이러한 관계는 서로를 지배하고 복속시키려는 파워게임의 과정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와 너”로서 인격적 만남은 불가능한 것인가? 근본적으로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며 “나”는 “너” 없이 살 수 없는 실존이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네가 있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거울이며 거울이 없는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이 된다. 그래서 인간이 사는 세상은 본시 “나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세상”이다. 세상은 나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아닌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서로 “나와 너”로서 존재하는 인간관계에 실패하고 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근본적 딜레마는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원하지만 바람직한 인간관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김춘수 시인의 “꽃”과 같은 시를 읊으며 근원적 딜레마로부터 벗어나려 애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 하루를 시작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꽃 같은 놈”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이성록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