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병(老兵)의 분노

노병(老兵)의 분노

by 운영자 2012.06.29

칠흑처럼 캄캄한 밤. 고 철 공작대장은 호도반도 적진지 깊숙한 곳에 착륙했다. 북파공작원과의 접속 장소인 해변 기슭 큰 바위에 몸을 숨긴 채 주변을 살폈다. 바닷가 바위 뒤에 검은 물체가 보인다.

권총을 빼든 채 낮은 포복으로 서서히 접근했다. “동무! 야밤에 왜 여기에 서성거리우까?”

“내래 영흥에 사는 농사꾼이우다. 소응진 딸네 집에 들렀다가 돌아가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매고 있수다. 여기 당원증과 통행증도 가지고 있수다” 너덜너덜 헤진 농부 복장 조끼에서 종이쪽지를 내민다.

내무서원이나 보위부원으로 알고 위기를 모면하려는 증명서다. 고 철 대장은 바짝 다가가 농부(북파공작원)의 귀에 대고, “동무! 나 국군이요. 공군 특무대원이요. 걱정말고 오우다.”

그제서야 반신반의하던 농부는 허리춤에서 신호용 플래시를 내보이며 “고맙수우다. 이렇게 위험을 무릎 쓰고 마중까지 나오다니 정말 고맙수우다.” 두 사람은 동시에 바다를 향해 황색 플래시로 신호를 보냈다. 0시 10분. 작전시간 10분이 초과됐다.

이세환 분견대장은 육지에서 300m 떨어진 해상 전마선에서 고 철 공작대장과 북파공작원을 초조하게 기다리다 신호를 보고 황급히 해변으로 접근했다.

두 사람은 쏜 살같이 전마선에 올랐다. 북파공작원 귀환 작전은 무사히 끝났다. 6·25전쟁 62주년을 맞아 6·25 때 공군특무대 대북 첩보작전요원으로 함경북도 원산 영흥만 모도와 성진 앞 양도 분견대장으로 첩보작전을 펼쳤던 대한언론인회 이세환(84) 원로 회원을 인터뷰 했다.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던 고 철 공작대장은 휴전 후 생사를 몰랐다가 50년 만에 만났다고 한다. 고 철씨는 현지에서 특채됐고, 공작원이란 특수 신분 때문에 인사기록이 없어 6·25참전 사실마저 의심받는 것이 안타까워 그의 아들(공군 대령)이 수소문한 끝에 이세환씨를 찾은 것.

신문기자 출신인 이 씨는 보관중인 자료에서 당시의 비망록과 빛바랜 사진을 찾아냈고 ‘인우보증’을 서 주었다. 그 뒤 고 철 씨는 ‘6·25참전유공자증’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대북 첩보작전 요원으로 활약했던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가 ‘동무! 나 국군이요’(예서원/2004년)이다.

“전시에 첩보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목숨을 건 팽팽한 긴장의 연속입니다. 북파공작원 침투작전에 투입 된 나의 부하 4명과 북파공작원 1명이 침투지점에서 인민군에게 발각 되어 총격전을 벌이다 전사했어요. 대원들을 잃은 충격과 슬픔은 아직도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고, 그분들의 영전에 바친다는 심정으로 기록을 남겼지요.”

그는 “우리나라 초·중·고·대학생 다섯 명 가운데 한 명꼴로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되어가고, 생존한 참전유공자에게 12만원의 수당은 참 낯부끄러운 현실”이라고 꼬집는다.

“목숨 걸고 지킨 나라인데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종북(從北)보다 종미(從美)가 더 문제라는 세력들에 억장이 무너진다”는 노병의 분노가 총알처럼 가슴에 꽂힌다.

이규섭<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