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by 운영자 2012.08.14
여름 피서지에서 책을 읽으며, 문득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보며 여름밤을 하얗게 지새버린 스물두살의 떨림이 다가왔다.
'80년 애타게, 자유를 갈망하며 캠퍼스와 도시 곳곳을 누비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군부독재 물러나라’ 구호를 외치던 시절이었다. 무참하게 짓밟힌 광주의 꿈과 수많은 주검들을 본 뒤, 피난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책과의 동행이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고, 또 몇 번이나 영화를 보았지만 헤밍웨이가 우리에게 주는 삶의 원론, 왜 사는가?의 궁극적 질문은 고전처럼 변함없는 ‘진실을 향한 염원’임에 틀림없다.
어린아이들에게 고전강의를 하면서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답을 말하는 초등학생들의 속내음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모두가 똑같은 답, ‘사랑으로 살아요’. 도대체 그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사랑’이란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는 모두가 잠잠하거나 공허해진다. 책을 읽고 나서, 공부를 하고나서 ‘왜’ ‘무엇으로‘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다면 분명 우리는 잘못된 독서였거나, 잘못된 공부임에 틀림없다.
순천의 최근 이슈는 <국제정원박람회>이다. 이에 따른 갖가지 소문과 문제점과 걱정들이 수없이 도시 곳곳에서 배회하며 방황하며 혼란스럽다. 최근 경전철에 관한 문제가 대두되어 마침내 감사원의 집중 감사에 들어갔다. 왜 이렇게 커졌을까? 600억원의 대규모 사업을 몇몇 사람들이 쉬쉬하며 비공개 계약을 체결했었다.
시민단체들과 환경단체들이 부당성을 지적하며 그토록 오래도록 외치고 부르짖었지만, 모두가 마치 옆집 개 짖는 소리처럼 외면해버린 공허한 메아리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들의 소리를 귀담아들은 몇몇 시의원들이 시의회 감사청구를 요청했지만, 계략적이며 무지한 다수 의원들의 횡포에 의해 세 번씩이나 부결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지켜보며 힘없이 주저앉아야 했던 쓰린 가슴의 회한이 밀려온다.
그렇게 무참했던 경전철의 부당성을 마침내 감사원에서 이유있다는 감사청구가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지금, 순천만을 가보라. 경전철 공사는 이미 공정의 반을 지나 앙상한 뼈대가 불쑥불쑥 세워져있다.
계약의 주도권을 잡은 업체에서는 공사를 중단시키는 방해 행위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을 묻겠다고 으름장를 놓는다. 그래서 반대단체는 어깨띠와 피켓 하나를 들고 1인시위에 그치고 만다. 도대체 이 지경으로 만든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과연 경전철은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독단적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그리고 이제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인가?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는 아직 미궁이다. 안개 속에서 추진하고 안개 속에서 진행 중이다. 아직도 정확한 규모나 정확한 예산소요의 예측도 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순천시의 간부들도 자세한 내역과 규모와 내막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혼돈의 상태에서 아이디어를 내라하고, 무수한 제안을 냈지만 어떻게 반영되고 개선되어 가는지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또 사후 관리 대책도 뒷감당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정확히 기획되지 않고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박람회인지? 한번 쯤 되새겨 볼일이다. 막대한 예산을 쏟아 넣는 이 일이 순천시민을 위한 것인지? 순천시를 위한 행사가 맞는지? 세계시장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아름다운 정원을 위한 정원박람회인지?
행정안전부에서는 10월부터 중앙부처와 지자체가 추진하는 대규모 투자사업 결정에 간여한 공무원 등 주요 관련자 명단이 최소 70년 이상 ‘준 영구적’으로 보관하도록 법적장치를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공문과 검토보고서 등 대규모 사업 관련 서류는 보존기간이 모두 준 영구적으로 설정된다. 이제 적어도 혈세에 대한 무책임한 허구의 낭비나 억지성 정책의 손해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껏 당한(?) 무책임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하긴 시민들의 유일한 권리는 선거에서 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다.
예술가는 누구를 위한 예술 활동을 펼쳐야 하는가? 당연히 관객이 주인공이다. 간혹 자신을 위한 예술 활동이라고 착각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큰 낭패다. 음악공연은 연주자를 위한 음악회가 아닌 관객을 위한 연주를 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
화가의 그림은 관람객을 위하여 그림이 존재해야 한다. 작가의 손을 떠난 원고는 이미 독자의 것이라는 뼈있는 창작공부를 해야 한다. 모든 예술 행위는 작가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철저히 독자를 위한 작품이 되어야 한다.
물론 한가지 전제는 작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스스로 감동을 느낄 때 또 다른 감동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어떤가? 공직자들은 진정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맞는가? 모든 공무원은 과연 시민 편에서 일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도 학교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지를, 종교가들도 대중이 주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검찰이나 재판부의 신뢰가 떨어지는 것도 첫 마음 때문이고, 정치도 국민의 마음이 떠나가는 이유를 되새겨 볼일이다. 많은 아이들이 꿈꾸는 의사라는 직업도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처럼 이태석 신부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본질로 충실히 돌아와야 우리사회는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가 날 수 있을 것이다.
순천의 도서관마다 방학 고전읽기가 한창이다. 어려운 고전을 읽으며 아이들의 눈망울이 변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느냐’는 첫 시간 질문에 ‘돈으로 살아요’라고 했던 아이가 이제 ‘행복하기 위해 살아요’라고 답해 주었을 때, 여름밤은 무척 행복했다.
그 아이의 꿈이 변했다. 높이 나는 것이 꿈이었던 꿈이, 높이 날고자 하는 또 다른 고향 갈매기들을 위해 기꺼이 생을 바쳤던 조나단처럼. 이제 나눔이 꿈이 되었다니, 더위 속 도서관 캠프의 훈장도 매우 기쁠 수밖에.
'80년 애타게, 자유를 갈망하며 캠퍼스와 도시 곳곳을 누비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군부독재 물러나라’ 구호를 외치던 시절이었다. 무참하게 짓밟힌 광주의 꿈과 수많은 주검들을 본 뒤, 피난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책과의 동행이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고, 또 몇 번이나 영화를 보았지만 헤밍웨이가 우리에게 주는 삶의 원론, 왜 사는가?의 궁극적 질문은 고전처럼 변함없는 ‘진실을 향한 염원’임에 틀림없다.
어린아이들에게 고전강의를 하면서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답을 말하는 초등학생들의 속내음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모두가 똑같은 답, ‘사랑으로 살아요’. 도대체 그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사랑’이란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는 모두가 잠잠하거나 공허해진다. 책을 읽고 나서, 공부를 하고나서 ‘왜’ ‘무엇으로‘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다면 분명 우리는 잘못된 독서였거나, 잘못된 공부임에 틀림없다.
순천의 최근 이슈는 <국제정원박람회>이다. 이에 따른 갖가지 소문과 문제점과 걱정들이 수없이 도시 곳곳에서 배회하며 방황하며 혼란스럽다. 최근 경전철에 관한 문제가 대두되어 마침내 감사원의 집중 감사에 들어갔다. 왜 이렇게 커졌을까? 600억원의 대규모 사업을 몇몇 사람들이 쉬쉬하며 비공개 계약을 체결했었다.
시민단체들과 환경단체들이 부당성을 지적하며 그토록 오래도록 외치고 부르짖었지만, 모두가 마치 옆집 개 짖는 소리처럼 외면해버린 공허한 메아리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들의 소리를 귀담아들은 몇몇 시의원들이 시의회 감사청구를 요청했지만, 계략적이며 무지한 다수 의원들의 횡포에 의해 세 번씩이나 부결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지켜보며 힘없이 주저앉아야 했던 쓰린 가슴의 회한이 밀려온다.
그렇게 무참했던 경전철의 부당성을 마침내 감사원에서 이유있다는 감사청구가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지금, 순천만을 가보라. 경전철 공사는 이미 공정의 반을 지나 앙상한 뼈대가 불쑥불쑥 세워져있다.
계약의 주도권을 잡은 업체에서는 공사를 중단시키는 방해 행위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을 묻겠다고 으름장를 놓는다. 그래서 반대단체는 어깨띠와 피켓 하나를 들고 1인시위에 그치고 만다. 도대체 이 지경으로 만든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과연 경전철은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독단적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그리고 이제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인가?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는 아직 미궁이다. 안개 속에서 추진하고 안개 속에서 진행 중이다. 아직도 정확한 규모나 정확한 예산소요의 예측도 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순천시의 간부들도 자세한 내역과 규모와 내막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혼돈의 상태에서 아이디어를 내라하고, 무수한 제안을 냈지만 어떻게 반영되고 개선되어 가는지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또 사후 관리 대책도 뒷감당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정확히 기획되지 않고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박람회인지? 한번 쯤 되새겨 볼일이다. 막대한 예산을 쏟아 넣는 이 일이 순천시민을 위한 것인지? 순천시를 위한 행사가 맞는지? 세계시장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아름다운 정원을 위한 정원박람회인지?
행정안전부에서는 10월부터 중앙부처와 지자체가 추진하는 대규모 투자사업 결정에 간여한 공무원 등 주요 관련자 명단이 최소 70년 이상 ‘준 영구적’으로 보관하도록 법적장치를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공문과 검토보고서 등 대규모 사업 관련 서류는 보존기간이 모두 준 영구적으로 설정된다. 이제 적어도 혈세에 대한 무책임한 허구의 낭비나 억지성 정책의 손해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껏 당한(?) 무책임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하긴 시민들의 유일한 권리는 선거에서 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다.
예술가는 누구를 위한 예술 활동을 펼쳐야 하는가? 당연히 관객이 주인공이다. 간혹 자신을 위한 예술 활동이라고 착각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큰 낭패다. 음악공연은 연주자를 위한 음악회가 아닌 관객을 위한 연주를 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
화가의 그림은 관람객을 위하여 그림이 존재해야 한다. 작가의 손을 떠난 원고는 이미 독자의 것이라는 뼈있는 창작공부를 해야 한다. 모든 예술 행위는 작가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철저히 독자를 위한 작품이 되어야 한다.
물론 한가지 전제는 작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스스로 감동을 느낄 때 또 다른 감동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어떤가? 공직자들은 진정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맞는가? 모든 공무원은 과연 시민 편에서 일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도 학교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지를, 종교가들도 대중이 주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검찰이나 재판부의 신뢰가 떨어지는 것도 첫 마음 때문이고, 정치도 국민의 마음이 떠나가는 이유를 되새겨 볼일이다. 많은 아이들이 꿈꾸는 의사라는 직업도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처럼 이태석 신부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본질로 충실히 돌아와야 우리사회는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가 날 수 있을 것이다.
순천의 도서관마다 방학 고전읽기가 한창이다. 어려운 고전을 읽으며 아이들의 눈망울이 변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느냐’는 첫 시간 질문에 ‘돈으로 살아요’라고 했던 아이가 이제 ‘행복하기 위해 살아요’라고 답해 주었을 때, 여름밤은 무척 행복했다.
그 아이의 꿈이 변했다. 높이 나는 것이 꿈이었던 꿈이, 높이 날고자 하는 또 다른 고향 갈매기들을 위해 기꺼이 생을 바쳤던 조나단처럼. 이제 나눔이 꿈이 되었다니, 더위 속 도서관 캠프의 훈장도 매우 기쁠 수밖에.

장윤호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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