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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연필이 보이면

버려진 연필이 보이면

by 운영자 2012.08.22

집에서 교회로 오가는 길엔 초등학교 앞을 지나게 됩니다. 초등학교가 동네에 있다는 것은 동네에 큰 생기를 전해주는 일입니다.

아침마다 등교를 하는 어린이들을 본다고 하는 것, 건널목 양 쪽에 깃발을 들고 서서 등교하는 어린이들의 안전을 돕는 도우미들을 본다고 하는 것,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에서 신나게 달음박질 하는 아이들을 본다고 하는 것, 하굣길 학교 앞에서 자녀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들을 본다고 하는 것, 군것질을 하며 친구들과 재잘거리는 모습을 본다고 하는 것, 이따금씩 정문 위에 나붙는 학교를 빛낸 어린들의 수상 소식을 대한다는 것, 모두가 정겹고 언제라도 생기 있는 풍경들입니다. 우리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다음 세대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요.

교회로 오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정문 앞 건널목을 건넌 뒤 학교 담장을 따라 언덕길을 올라야 합니다. 다세대 주택과 나란히 마주하고 있는, 담쟁이 넝쿨이 손을 뻗는 붉은 벽돌 담장입니다. 아이들이 장난삼아 적은 누군 누굴 좋아한다는 낙서가 곳곳에 보이고,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것이라고는 보기 힘든 민망한 글이나 그림도 보입니다.

골목길을 지날 때면 이따금씩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연필입니다. 예전과는 달리 요즘의 아이들은 웬만한 물건쯤은 잃어버리고도 찾아가지를 않는다는 말을 학교 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까짓것 다시 하나 사면 되지 창피하게 잃어버린 것을 찾나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라면 연필 하나 떨어뜨린 것에 굳이 마음을 둘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새 것도 아닌, 쓰다만 만 연필에 누가 마음이 가 떨어진 연필을 주울까 싶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골목길을 오가다 이따금씩 만나는 바닥에 떨어진 연필은 아이들에게 버림받은 천덕꾸러기처럼 보입니다.

골목길을 오가다 떨어진 연필이 보이면 걸음을 멈추고 연필을 줍습니다. 까짓 연필이야 문방구에 들르면 얼마든지 새 것을 넉넉히 살 수도 있고, 심만 갈아 끼우면 편하게 쓸 수 있는 필기구가 없는 것 아니면서도 굳이 떨어진 연필을 보면 집어 듭니다.
가난한 시절 연필과 공책을 아껴 쓰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지우개로 지운 뒤 공책을 다시 쓰기도 했고, 다 쓴 몽당연필을 볼펜 자루 끝에 끼워 길이를 늘려 쓰기도 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특별한 날에 선물이나 상품으로 새 연필이나 공책을 받으면 가슴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는 했지요. 아마도 버려진 연필을 집어 드는 것은 가난한 시절에 대한 아련한 기억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버려진 연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데에는 또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버려진 연필로도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버림받은 못난 연필로도 얼마든지 좋은 글을 쓸 수가 있는 것이지요. 못난 연필로는 못난 글만 써야 한다는 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버려진 것은 단지 쓰다가 만 연필 한 자루가 아니라 아직 부르지 못한 노래와 시들 아닐까요?

혹은 마음속을 지나가는 좋은 생각들일 수도 있고요. 마음 아픈 누군가에게 얼마든지 전할 수 따뜻한 마음이기도 할 것이고요. 대단할 것 하나 없지만 그래도 연필에 대한 예의를 갖추듯, 사막에서 펄떡이는 고기 한 마리를 길어올리듯 버려진 연필이 보이면 걸음을 멈추고 집어 듭니다.

한희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