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인과 어르신

노인과 어르신

by 운영자 2012.09.17

점차 고령사회가 도래하니 위기감 때문인지 가끔 본질보다 비본질적 문제에 매달리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2011년 12월 29일 일부 국회의원들이 ‘노인’이라는 용어를 ‘시니어’로 바꾸자는 노인복지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하였더군요.

개정제안 이유를 보면 “노인이라는 용어는 사전적으로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 이라는 의미 외에 단어 자체가 ‘무기력하다’ ‘병약하다’는 부정적 어감을 가지고 있어 현재 공공용어의 용도 외 일상 생활용어는 물론이고 방송용어로도 잘 사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임”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노인’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일상적으로나 공식적으로 사용해 오던 말입니다. 물론 신체적 변화를 전제하는 ‘실버’라는 국적불명의 용어가 난무하는 터에, 역할의 변화를 전제하는 ‘시니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낫기는 하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굳이 법까지 개정하려드는 것은 그야말로 넌 센스였지요. 결국 여론이 좋지 않자 이 법률 개정안은 발의했던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철회하였지만, ‘노인’이냐 ‘시니어’냐 라는 것을 두고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는 그 자체가 하릴없어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울시가 노인을 존중하기 위해 각종 공문서와 행정용어에 어르신이란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향후 새로 건립되는 노인복지관은 ‘어르신 복지관’이라고 바꾸고, 경로당은 ‘어르신 사랑방’으로 병기할 방침이라니 참으로 하릴없었나 봅니다.

물론 노인을 우대하겠다는 뜻은 고맙지만 그런다고 노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개선되어질까요? 오히려 고령화시대를 맞아 노인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제도와 정책의 개선이 더 급선무 아닐까요?

그런데 이미 어르신이란 말은 일상 속에 널리 사용되고 있음에도 새삼 공모를 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상까지 주었다니 그야말로 웃지 못 할 코미디 아닌가요? 그리고 최소한 우리말의 용법만이라도 지켜주어야 하지 않나요?

현실적으로 "어르신"이란 호칭은 이미 자연스럽게 예를 갖춘 호칭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노인은 공식적인 지칭어로서 사용되고 있는데 굳이 호칭어를 지칭어로 삼겠다는 것은 혼란을 야기하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나아가 백번 이해한다고치더라도 노인에 대한 인식 변화와 사회적 서비스의 개선 없이 용어만 바꾸면 무슨 소용인가요?

이는 의도와는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용어에 관한 무지와 인기영합을 드러낸 말장난일 뿐입니다. 참고로 호칭어는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을 부를 때 쓰는 말이며, 지칭어는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을 대상으로 파악하여 가리킬 때 쓰는 말이지요. 어르신은 호칭어, 노인은 지칭어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용법을 무시하고 예컨대 경로당을 "어르신 사랑방"이라 칭한다면 경로당을 사용하는 분들에겐 스스로 높여 부르려니 매우 어색한 일이 되지요. 게다가 극단적 사례로서 예컨대 "노인범죄"를 "어르신범죄"라고 한다면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닌가요?

지금은 용어 바꾸기의 립 서비스 보다는 미래사회를 위한 노인복지 정책을 수립하고 고령사회를 대비하는 진정어린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성록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