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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삭고 농익은 느림의 연기

곰삭고 농익은 느림의 연기

by 운영자 2013.03.08

노 배우의 연기는 곰삭고 농익었다.

슬로우비디오를 보듯 느리고 긴 호흡에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흡인력이 있다. ‘연기 같지 않는 자연스러운 연기’에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였다. 상황 따라 변하는 아득한 표정과 강렬한 눈빛에 삶의 체취가 묻어난다.

3월의 둘 째 날, 연극 ‘3월의 눈’에서 노인 ‘장오’역을 맡은 변희봉을 배우와 관객으로 40 여년 만에 만났다.

그를 연극 무대에서 처음 본 것은 1970년 명동 국립극장서 막을 올린 ‘왕 교수의 직업’(차범석 작)이다. 재벌 등에 업혀 갑자기 명사가 된 ‘왕 교수(전운)’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속물근성과 세대 간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히피족이 된 아들 역을 맡아 아버지에게 반항하던 변희봉의 연기가 기억에 남는다. 이제 그는 70대에 접어든 관록의 배우로 무대에 올라 세월의 무게를 풀어낸다.

232석을 꽉 채우고 보조석을 메운 관객들 가운데 필자가 가장 나이 많은 관객으로 보인다.

성우로 출발하여 연극무대에서 연기력을 다진 변희봉은 영화와 TV드라마에서 개성 넘치는 연기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스펙트럼이 넓은 연기에 삶의 페이소스가 묻어난다.

어렸을 적부터 그의 연기에 매료되었다가 메가폰을 잡은 뒤 카메라 앞에 세웠다는 봉준호 영화감독은 “그의 연기에 미묘한 기운과 에너지가 감돌고 있다”면서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배우”라고 칭송했다.

‘3월의 눈’은 2011년 3월 ‘백성희·장민호극장’의 개관 작품으로 두 원로 배우가 출연, 혼신의 연기를 펼쳐 화제를 모았다.

서울역 뒤 옛 기무사 수송대 건물을 개조하여 2010년 말 문을 연 ‘백성희·장민호극장’은 생존해 있는 배우의 이름을 딴 국립극장으로 우리 연극사에 처음이다. 장민호 선생은 지난해 11월 88세를 일기로 무대를 저 세상으로 옮겼다.

앙코르공연에서 변희봉이 주역을 맡았고, 아내 ‘이순’ 역은 백성희와 박혜진 더블 캐스팅이다.

인생의 끝자락에 선 노인이 재개발 열풍 속에 마지막 남은 한옥을 팔고 3월의 눈이 내리는 날 양로원으로 떠난다는 이야기다.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투쟁하던 외아들은 행방불명이다. 아비 얼굴도 모르고 자란 손자는 빚을 졌고, 그 빚을 갚아주기 위해 노인은 손때 묻은 정든 집을 넘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의 일상을 잔잔한 대화로 애잔함을 풀어낸다. 볕 좋은 한옥의 툇마루에 앉아 이순은 뜨개질을 하고, 장오는 말라비틀어진 마당의 화분을 옮긴다.

노부부는 퇴색한 창호지를 뜯어내고 새로 바른다.

새 집주인이 보낸 인부들이 마룻장을 뜯어내고 문짝을 들어낸다. 집은 하나 둘씩 사라지고 앙상한 뼈대만 남는다.

자극적인 내용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느릿하고 조용하게, 노배우가 멈춰 세운 시간 속에 변화의 바람은 일고, 느린 연기와 침묵이 ‘느림의 미학’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모든 것 다 비우고 쓸쓸히 떠나는 모습이 우리네 인생살이와 같다.

사라져가는 아련한 슬픔에 ‘비움의 미학’이 도드라져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내리면 바로 녹는 3월의 눈처럼….

<이규섭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