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와 우리 사회
‘위대한 개츠비’와 우리 사회
by 운영자 2013.07.05
경제가 어렵다는데 6월까지 영화 관객은 9850만 명으로 지난해에 비해 18.3% 증가했다. 그 중 한국 영화의 관객 점유율이 56.4%로서 5555만 명이다.
상위 10위 안에 한국 영화가 6편을 차지하고, 1편은 관객 1000만을 넘겼다. 문화산업으로서 영화의 힘이 대단하다.
필자도 상반기에 영화 3편을 봤으니 관객 증가에 일조한 셈이다. 6월에 본 “위대한 개츠비”와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은 동일한 점이 많았다.
이 영화는 1974년에도 나왔던 것이므로 나이 드신 분들에겐 귀에 익은 영화 제목이다. 영화가 썩 잘 됐다는 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피츠제랄드의 원작 소설 “위대한 개츠비” 때문에 관심을 기울였다.
“위대한 개츠비”는 흔한 사랑 이야기인데, ‘아메리칸 드림’과 맞닿아 있어서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아메리칸 드림’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지상 낙원을 건설하려던 꿈이었다.
하지만 이 꿈은 성공과 신분 상승의 욕망, 물질적인 성공 신화로 왜곡되고 만다.
개츠비는 이 변질된 ‘아메리칸 드림’을 잘 보여 주는 인물이다. 부자가 되어 가난 때문에 잃은 데이지의 사랑을 되찾으려는 그의 꿈은 순진하고 낭만적이지만, 그의 이상은 현실의 타락과 연결된다.
청교도들의 ‘아메리칸 드림’이 물질주의와 손잡으면서 변질된 것처럼, 개츠비의 이상이 물질주의로 타락했다.
한편, 데이지는 남편의 방탕과 여성 편력에 지쳤지만, 부와 상류 계급이라는 신분이 주는 물질적 풍요 때문에 남편 톰을 떠나지 못한다. 그래서 개츠비와 함께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다.
가장 기막힌 것은 개츠비가 그렇게나 사랑했고, 무한한 꿈이었던 데이지가 그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여자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개츠비의 순수한 사랑보다 그가 보여주는 저택과 영국에서 수입한 고급 옷감에 감동해서 울 정도로 속물적이며, 톰처럼 자신이 저지른 무책임한 행동의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비겁한 여자였다.
데이지는 온갖 부도덕한 죄를 개츠비에게 덮어씌우는 남편과 공모자가 되어 떠난다.
그러나 개츠비는 자신의 꿈에 끝까지 집착한다. 개츠비는 타락한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한 대다수 미국인의 자화상이었다.
소설을 쓰는 닉은 개츠비가 품은 독특한 낭만적 꿈과 환상 때문에 그를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한다. 개츠비는 끊임없이 좌절하면서도 삶의 낭만적 가능성을 믿고 ‘환희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끈질긴 희망과 용기 때문에 위대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맹목적으로 돈과 출세를 추구하던 시대에 바보처럼 순수했다는 사실이 위대하다.
개츠비의 무대인 ‘재즈시대’는 1차 세계대전의 종전부터 1929년 경제대공황 이전까지, 미국의 1920년대를 가리킨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깊은 회의와 허무감에 빠진 시대였지만, 미국 상류층은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흥청망청 돈을 썼다.
당연히 경제성장의 이면에 도덕적 타락과 부패가 도사리고 있었다. 개츠비 저택에서 열리는 소모적인 파티와 거기 모인 사람들은 도덕적 불감증을 대변한다.
이렇게 영화나 소설로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위대한 개츠비”에 나타난 타락한 사회는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루고 도덕적 타락에 빠진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 는지? 탈세, 횡령, 투기를 비롯한 범죄자들이 당당하게 권력과 명예까지 거머쥐는 도덕 불감증 사회. 인간보다는 돈을 앞세우고, 권력 쟁취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 현실. 상류층은 돈과 권력에 취했으나 젊은이들은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로 몸부림친다.
그래도 우리 주위에 개츠비보다 더 위대한 인물들이 왜 없겠는가. 영화와 책은 물론 괜찮은 사람도 찾아보면서 무더위와 장마철을 잘 넘기길 빈다.
<박두규>
광주ㆍ전남 시민포럼 공동대표
상위 10위 안에 한국 영화가 6편을 차지하고, 1편은 관객 1000만을 넘겼다. 문화산업으로서 영화의 힘이 대단하다.
필자도 상반기에 영화 3편을 봤으니 관객 증가에 일조한 셈이다. 6월에 본 “위대한 개츠비”와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은 동일한 점이 많았다.
이 영화는 1974년에도 나왔던 것이므로 나이 드신 분들에겐 귀에 익은 영화 제목이다. 영화가 썩 잘 됐다는 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피츠제랄드의 원작 소설 “위대한 개츠비” 때문에 관심을 기울였다.
“위대한 개츠비”는 흔한 사랑 이야기인데, ‘아메리칸 드림’과 맞닿아 있어서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아메리칸 드림’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지상 낙원을 건설하려던 꿈이었다.
하지만 이 꿈은 성공과 신분 상승의 욕망, 물질적인 성공 신화로 왜곡되고 만다.
개츠비는 이 변질된 ‘아메리칸 드림’을 잘 보여 주는 인물이다. 부자가 되어 가난 때문에 잃은 데이지의 사랑을 되찾으려는 그의 꿈은 순진하고 낭만적이지만, 그의 이상은 현실의 타락과 연결된다.
청교도들의 ‘아메리칸 드림’이 물질주의와 손잡으면서 변질된 것처럼, 개츠비의 이상이 물질주의로 타락했다.
한편, 데이지는 남편의 방탕과 여성 편력에 지쳤지만, 부와 상류 계급이라는 신분이 주는 물질적 풍요 때문에 남편 톰을 떠나지 못한다. 그래서 개츠비와 함께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다.
가장 기막힌 것은 개츠비가 그렇게나 사랑했고, 무한한 꿈이었던 데이지가 그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여자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개츠비의 순수한 사랑보다 그가 보여주는 저택과 영국에서 수입한 고급 옷감에 감동해서 울 정도로 속물적이며, 톰처럼 자신이 저지른 무책임한 행동의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비겁한 여자였다.
데이지는 온갖 부도덕한 죄를 개츠비에게 덮어씌우는 남편과 공모자가 되어 떠난다.
그러나 개츠비는 자신의 꿈에 끝까지 집착한다. 개츠비는 타락한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한 대다수 미국인의 자화상이었다.
소설을 쓰는 닉은 개츠비가 품은 독특한 낭만적 꿈과 환상 때문에 그를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한다. 개츠비는 끊임없이 좌절하면서도 삶의 낭만적 가능성을 믿고 ‘환희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끈질긴 희망과 용기 때문에 위대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맹목적으로 돈과 출세를 추구하던 시대에 바보처럼 순수했다는 사실이 위대하다.
개츠비의 무대인 ‘재즈시대’는 1차 세계대전의 종전부터 1929년 경제대공황 이전까지, 미국의 1920년대를 가리킨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깊은 회의와 허무감에 빠진 시대였지만, 미국 상류층은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흥청망청 돈을 썼다.
당연히 경제성장의 이면에 도덕적 타락과 부패가 도사리고 있었다. 개츠비 저택에서 열리는 소모적인 파티와 거기 모인 사람들은 도덕적 불감증을 대변한다.
이렇게 영화나 소설로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위대한 개츠비”에 나타난 타락한 사회는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루고 도덕적 타락에 빠진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 는지? 탈세, 횡령, 투기를 비롯한 범죄자들이 당당하게 권력과 명예까지 거머쥐는 도덕 불감증 사회. 인간보다는 돈을 앞세우고, 권력 쟁취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 현실. 상류층은 돈과 권력에 취했으나 젊은이들은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로 몸부림친다.
그래도 우리 주위에 개츠비보다 더 위대한 인물들이 왜 없겠는가. 영화와 책은 물론 괜찮은 사람도 찾아보면서 무더위와 장마철을 잘 넘기길 빈다.
<박두규>
광주ㆍ전남 시민포럼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