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참호에서 잠을 자는 여인

참호에서 잠을 자는 여인

by 운영자 2013.08.01

아침에 동네 우면산을 오른다. 장마중이라 우중충한 하늘에서 가늘게 비가 내린다. 나는 우산 없이 일부러 비를 맞는다. 온몸으로 하늘을 받아내는 일 같아 비 맞는 일이 좋다.

소나무숲 사이로 난 산비탈 길을 오를 때다. 누군가 어둑한 숲길을 타고 내 앞에 바짝 다가왔다. 순간 섬뜩했다. 손으로 비를 가린, 검정옷을 입은 마흔 중반의 여인이다. 언젠가 한번 본 기억이 있다.

눈이 녹아가던 지난 겨울에도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때도 나는 이 소나무 숲길을 오르고 있었다. 소나무 숲이 끝나는 지점에 약간 평평한 길이 한 자락 놓여있다. 그쯤에 눈을 밟고 서서 간단히 몸을 풀고 있을 때다.

“바삭! 바삭!”

난데없이 등 뒤에서 눈 밟는 소리가 났다. 놀란 나는 운동을 멈추고 휙 돌아다 봤다. 낡은 검정외투를 끼어입고 또 끼어입어 덩치가 산만한 여인이었다.

나는 얼른 그 곁을 떠났다. 산을 오르다 보니 그녀가 천천히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쪽 참호에 여자가 살아요.”

언젠가 이 길을 오를 때 산에서 몇 번 만난 적 있는 분이 내게 말했었다.

정말이지 몇 걸음 더 가자, 오리나무 사이로 좀 전의 그녀가 걸어온 발자국이 자박자박 눈 위에 찍혀 있었다. 눈 그친 이후로 처음 걸어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우두커니 그녀가 걸어나온 길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가면 이 산중에서 가끔 보던 참호가 나오겠다. 한 때 시멘트로 만들어놓은, 출입문도 창문도 없는, 버려진 참호. 그곳이 그 여인이 삼동을 나는 집인 셈이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많았다. 그 혹한의 겨울을 나느라 그녀는 어디선가 구한 검정외투를 끼어입고, 또 끼어입었을 것이다.

빛 한 점 없는 칠흑의 산중에서 이 거대한 산이 만들어내는 두려움과 홀로 싸우며 또 살아냈을 것이다.

나는 남부순환도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 건너에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부유한 고층아파트와 밀림 같은 빌딩숲, 그리고 넓은 도로를 질주하는 승용차들이 보인다.

그녀는 참호에 난 작은 구멍으로 자본주의의 도시가 내뿜는 이 번쩍이는 문명들과 마주 했을 것이다. 그녀는 거기에서 무얼 보았을까? 우리가 훈훈한 거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커피 향을 즐길 때 그녀는 언 손을 부비며 차가운 눈물을 떨구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비를 맞으며 사치스럽게 산을 오르는데, 그녀는 그 비가 싫다. 무성한 숲을 한번 둘러본다. 위대하다. 인간이 껴안지 못하는 그녀를 산이 껴안는다.

<권영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