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추억의 포도

추억의 포도

by 운영자 2013.08.19

강판권 교수

포도나뭇과의 포도는 생명의 나무이다. 덩굴성 포도나무만큼 인간에게 큰 위안을 주는 존재도 드물다. 포도는 그 어떤 나무보다 많은 열매를 맺고, 그 열매는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에서 포도를 재배할 수 있을 만큼 적지 않은 포도를 생산하지만, 공급이 수요를 맞추지 못해 칠레와 미국 등 외국산 포도가 지배한다. 나의 고향 우물가에도 한 그루의 포도가 살고 있다. 40여 년 동안 해마다 포도를 먹을 수 있는 것도 고향의 포도 덕분이다.

포도나무의 잎은 아주 크다. 그래서 나무의 열매는 잎의 보호를 받고 자란다. 열매가 태양에 완전히 노출되면 큰 피해를 입는다. 고향의 포도나무도 우물가에 앉으면 잎의 보호를 받고 있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그러나 고향의 포도는 요즘처럼 달콤한 맛을 자랑하는 개량포도나무가 아니라 조금 신맛이 감돈다. 고려 말의 목은 이색(1328-1396)이 맛본 포도도 고향의 포도와 닮았다.

누가 만개의 알맹이에 새콤달콤한 맛을 숨겨놓았을까.
이와 혀 사이로 맑은 진액이 흐르는구나.?

새콤달콤한 포도의 맛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지만, 지금의 포도는 단 맛이 아주 강해서 군침이 돌지 않는다. 나는 무척 포도를 좋아한다. 포도만 먹으면 기운이 솟는다.

포도는 옛날부터 병을 낫게 할 만큼 귀한 식물이었다. 특히 조선 태조의 포도 사랑은 아주 지극했다. 병에 걸려 앓아누운 태조는 1398년 9월 1일 수정포도가 아주 먹고 싶어 조순에게 포도를 바치라고 명했다.

조순은 이 사실을 세자와 여러 아들에게도 전했다. 태조의 자식들은 급히 세자와 여러 왕자들이 모두 소리를 높여 울면서 즉시 상림원사(上林園史) 한간(韓幹)에게 명하여 유후사(留後司)와 기내 좌도(畿內左道)에 포도를 구했다.

마침 경력(經歷) 김정준(金廷雋)이 산포도가 서리를 맞아 반쯤 익은 것을 한 상자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태조는 포도를 먹고 병이 나았다. 포도를 먹고 병이 나았다는 얘기는 조선의 문인 서거정의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박보다 달콤하고 우유보다 매끄럽구나. 한 알만 입에 넣어도 고질병이 낫구나.?

태조가 병에 걸려 포도를 먹고 나은 것은 특별히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포도가 먹고 싶은 병이었을지도 모른다. 서거정의 시도 포도 한 알을 먹으면 고질병이 실제 낫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 맛이 있다는 뜻일 게다.

조선의 성종은 1492년 8월 12일에 승정원 홍문관 등에 술과 포도를 내려주고 근체시를 지어 바치게 했다. 성종은 포도를 신하들에게 내려주면서 포도의 맛과 감사의 뜻을 담은 시를 강제로 바치게 했다.

이처럼 성종이 포도를 하사하면서 시를 짓게 한 것은 포도가 그만큼 귀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조선시대의 화가들도 포도를 즐겨 그렸다. 그 중에서도 황집중은 <포도>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 중 간송미술관 소장의 모시에 수묵으로 그린 그림에는 반 정도 익은 포도가 등장한다.

포도가 귀했던 시절에는 반 정도 익은 포도는 다 익기도 전에 따 먹었다. 그 당시에는 익지 않은 포도도 무척 맛있었다.